#깨달음 #연기법 #존재 #실상
이원적 실체적 관념,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닌데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생각 구조를 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중심 만들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실제로는 중심이 없는데도 가상으로 중심을 만들어버리고 중심과 중심 아닌 것으로 나눈다는 말이다. 그 중심은 보통 '주체'라는 말로도 표현하는데,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중심이 정말로 중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심은 무게 중심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 즉 주체성을 말한다.
이 중심 만들기의 양상은 '이름 짓기'로 드러난다. 이름 짓기라는 것이 단순히 언어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깊이 따져보면 이런 중심 만들기라는 근간이 자리한다. 언어 자체가 이런 중심 만들기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언어라는 게 이원성 혹은 상대성의 구조를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드러난 모든 것이 상대성의 범주라는 것은 연기법과 일맥상통한다.
이름 짓기 혹은 중심 만들기라고 하니 이름을 짓건 안 짓건 세상이 그렇게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정확히 내가 품었던 의문이고 대부분의 공부인들이 걸려있는 의문이다.
이름을 지으면 그 이름이 유령처럼 남는다. 개념이고 생각인데, 그 개념과 생각이 망령처럼 붙어서 존재성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사과를 하나 앞에 두고 있다고 치자.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그 사과는 과연 어느 순간의 사과겠는가? 지금? 혹은 어제? 방금? 1분 전? 10분 전? 그 순간의 흐름을 뚫고 '사과'라는 이름이 그것을 붙들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도 동일한 그 '사과'라고 이름 지어진 것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사과'라는 이름과 개념을 유지하면서 존재성을 붙들 뿐이다. 방금 전과 지금의 사과 모양이 동일하다고 해서 그 존재성이 이어지는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기관은 이것을 잡아낼 수 있을 만큼 정교하지 못하다. 이에 더해 우리는 생각을 통해서 개념을 만들어내고 붙들어 버린다..
이 탐구의 과정 상에서 무엇이든 존재성을 갖고 여전히 이어져 보인다고 한다면 각도를 조금 달리해서 살펴보는 방법도 있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개념상에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그 '학교'에 해당하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보는 것이다. 건물이 있고 교문이 있고 교실이 있고 선생님이 있지만 실제 '학교'라고 하는 '것'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집합체를 '학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름을 부르다 보면 마치 '학교'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 착각이 일어난다. 언어와 개념은 유용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용성은 실상과는 상관이 없다. 누구에게 유용하다는 말인가?
그러면 학교는 개념이라 해도 그 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건물은 어떨까? 건물 자체는 그러면 있는 것인가? 무엇을 건물이라고 하는가? 건물 역시 유리창과 시멘트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지금 이런 모양으로 생긴 것을 건물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건물이라는 것 역시 무언가의 집합을 일켵는 말일뿐이다. 그러니까 건물이라고 하는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 역시 아닌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관찰을 통해 생각으로 그 존재성을 부여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이 모양 자체가 존재를 증거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모양을 해석하면서 생긴 것이 '존재'라는 개념일 뿐이다.
학교라는 것은 이렇게 이해가 가능하지만 자동차라는 것은 어떨까. 기름을 넣고 이리저리 이동하는 자동차를 우리는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니 매우 실재하는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실상은 방금 저기 있던 자동차가 그대로 여기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 자동차라는 현상만 관찰될 뿐이다. 그럼 지금 관찰되는 이 자동차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바퀴와 창문이 달린 검은색 철판이 덫 데어진 이것을 우리는 자동차라고 부른다. 부르는 것은 자유다. 자동차라고 불러도 되고 사과라도 불러도 되지만, 어쨌든 이런 모양의 것을 우리는 '자동차'로 부르기로 약속했으니 '자동차'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나 그 자동차라는 '것'을 찾아보려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만 반복적으로 깨닫게 될 뿐이다.
우리의 생각 구조로 인해서 발생하는, 무의식적으로 상정하는 주체성이란 것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까. 모양을 기준으로 대상을 구분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언뜻 보면 매우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 타당성의 기준은 대부분 유용함이다. 그 유용함이 역으로 존재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지만 아무리 유용하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망치를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해서 그 망치란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양을 중심으로 범주를 설정하고 주체를 설정하는 이원적 버릇은 여전하고, 상대성 안에서 의 그 효용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 상대성 속에서의 효용성에 대해서 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으므로 지금 우리의 주요 관심사가 아닐 뿐이다.
그런 효용성과 상관없는 것을 왜 추구하는지 궁금한가?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에 대한 답이다.
세상에는 중심이 없다. 중심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절대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설정하는 모든 중심은 사실 임시적인 약속인 것이지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성, 즉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들 속에선 그런 절대의 자리는 없다. 그 절대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우주를 떠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과학을 통해, 철학을 통해, 예술을 통해, 종교를 통해 끊임없는 추구를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노력의 중심을 되돌아보지 않는 한 영원히 자신의 꼬리를 물기 위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