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총합

*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에서 인용함

by pathemata mathemata

인간의 삶은 자연의 법칙을 닮았다. 충만함에서 시작하여 덧없이 소멸한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1개의 세포에서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세포로 분열되어 성장하지만 그 끝은 0으로 수렴된다. 간단히 줄이면 1은 0으로 바뀐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이유는 이러한 덧없음을 극복하고 영원성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1년 국내 출산율은 0.81이다. 인구 소멸이 시작되었고 실제로 작년에 5만 명이 넘는 인구가 감소했다. 태어나는 이가 죽은 이와의 간극을 메우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제 사랑하기를 멈춘 걸까?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느 때보다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TV를 비롯한 각종 방송 플랫폼에는 사랑과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자만추(자고 만남 추구)'와 같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이성 간 가벼운 만남이 일상화되었다. 혼전 동거에 대한 터부도 어느 정도 사라져 20대 남녀가 오피스텔에서 사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있지만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대신 아이를 낳지 않고 개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사족을 붙이면 이러한 세태를 풍자한 <보스 베이비>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고등교육에 따른 만혼, 만혼에 따른 난임, 결혼과 출산 과정에서 여성의 경력단절 등 다양한 논리적 이유를 찾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아무래도 반려견(묘)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 나은 이유를 공무원들이 찾지 못했나 보다. 나는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 것을 고통으로 여긴다. 출산의 고통과 위험은 현대 의학으로 극복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엄청난 부양 비용을 지불하길 원치 않는다. 아이를 포기하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아이가 불행의 씨앗이 되는 데는 역설적으로 성인이 된 자신의 성장과정을 반추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적 지상주의에 따른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과 사교육 우선주의는 학창 시절을 암울한 과거로 기억하게 만든다.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는 방법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태어날 자신의 아이 역시 사교육을 통해 아이를 기를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교육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의 아이를 명문 대학에 진학시킴으로써 좋은 삶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명문대의 정원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그 틈새에 들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사교육이다. 입시 위주 사교육을 많이 받으면 성적이 향상되니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자녀를 학원에 등록시킨다. 이 상황은 지난 냉전 시절의 군비경쟁처럼 게임이론이 적용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게임의 법칙을 뒤집을 생각은 없다.


실제로 사회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명문대학교 졸업장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확률이 높아질 순 있겠지만, 공부에 흥미와 적성이 모자란 자녀가 학원 다닐 돈을 모아 창업에 도움이 되게 해준다면 어떨까? 그러나 부모 중 자녀에 관심이 있는 쪽은 여자인 엄마 쪽이며, 이들의 사회 경험은 남자보다 훨씬 제한적이다. 단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여 자녀에게 계급적으로 높아 보이는 명문대 간판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 공부를 통한 성취와 적성이 맞는 자녀도 존재한다. 그러나 스스로와 주변 친구들을 반추해 보자.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많았는지? 공부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일부 스포츠나 예체능 계열을 준비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학업의 길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한다. 실제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이후에도 후진학제도를 이용해 야간대학교를 졸업하는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좋은 직장을 남들보다 일찍 다녀도 대학 졸업장을 스스로 원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미셸 푸코가 학교를 병영과 감옥에 빗댄 것은 좋은 지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고학력 노동자로 숙련되도록 강요받는다. 흑인이 백인처럼 사고하듯이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대졸이 아닌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사회이다.


불행은 전염성이 큰 질병이지만 안타깝게도 행복은 전염성이 없다. 특히 타인이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면 불행해지는 것이 흔한 증상이다. 오히려 타인의 행복이 불행의 원인이다. 헤겔 식으로 말하면 즉자적으로는 행복하나 대자적으로는 불행하다. 여기에 즉자대자의 개념은 스토이시즘이라고 불리는 과거 스토아학파가 내세운 마음의 평정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평화는 성립하지 않고 행복과 불행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를 수 없다. 적어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대자적으로 살 뿐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교하며 내적 충만함과 무관하게 영원히 결여된 체로 살아간다.



한국인의 아파트를 생각해 보자. 전체 주택 중 78.3%(2021년, 통계청)가 공동주택이다.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공간 부족으로 생겨난 주거환경이겠지만, 이는 사람들의 획일화를 가속화시켰다. 학교나 감옥이 동일한 형태의 직사각형 방의 총합인 것처럼 아파트 역시 각 단지별로 같거나 유사한 형태로 가구가 끝없이 배치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규격화는 주택을 주거 목적뿐만 아니라 투자 수단으로 만들어 주식보다 더 선호하게 되었다. 국내만큼 매매가 편리한 주택이 다른 나라 어디에 또 있을까?


아파트의 투기화는 과거의 삶의 공간을 재개발과 재건축의 대상으로 범주화시켰다. 지켜야 할 유산은 없고 정주민들은 집값이 오르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건축물들은 세워지면서 인간보다 짧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안전진단을 통과하여 언제라도 빨리 재건축조합원이 되길 희망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도 주인공이 비꼬았지만, 안전진단 통과의 의미는 D 등급을 받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청운의 꿈을 함께 했던 집이 허물리길 학수고대한 세대들이 만들어낸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 투기를 통해 MZ 세대의 부모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처럼 자녀를 대학 보내려고 소와 전답을 팔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자녀의 학원비도 내고, 대학 등록금도 낼 수 있었는데도 경제사정은 평균적으로 나아졌다. 어찌 보면 오마카세, 한정판 명품, 해외여행을 어릴 적부터 접하게 된 고학력의 MZ 세대는 최대 수혜자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젊은 세대는 일반적으로 윗세대들이 집값을 올렸다고 크게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마을 돈을 끌어다 해외로 도주한 부모를 둔 가수는 결국 범죄자의 수익을 나눠 가진 셈이니까.


이제 부동산 투기의 역사는 폰지 사기와 같이 더 이상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종언을 고하려고 한다. 그것은 출산율 하락으로 인해 시작된다. 여전히 비혼 1인 가구 수요가 있기 때문에 집을 살 수 있는 수요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이 비혼을 계속 유지하는 한, 비혼 세대들이 마지막으로 산 집은 팔리지 않게 된다. 모든 투기는 버블이 존재하고, 부동산 버블은 2021년에 거의 정점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부동산 투기로 인해 국민 소득이 올라갔어도 불행한 사람들은 점점 늘어난다. OECD 국가 자살률 1위를 17년째 유지하고 있고 OECD 평균(10만 명당 11.3명) 대비 2배 넘게 자살(10만 명당 24.6명) 한다. 의사들은 그 원인을 우울증에서 찾고 있다. 사실 정신분석의 시작이 여성의 히스테리 기원을 찾으려고 시작하였는데, 동시대에 프로이트가 있었다면 우리나라 국민의 히스테리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악명 높은 프로이트의 명제인 '여성은 초자아가 없다'가 아니라 '한국인은 초자아가 없다'로 정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증을 가진 문명에 부적합한 주체로서의 여성적인 한국인이라고 적으면, 국수주의자 및 페미니스트들에게 국공합작처럼 좌우로부터 공격 대상이 될 테지만, 어쨌든 증상은 그렇게 진단된다. 남근*이 없는 생물학적 여성과 남근이 환상적으로 거세된 남성들이 규격화되고 대체로 협소한 아파트에 주로 살고 있으며 존댓말이 존재하는 한국어는 유년기부터 대타자의 욕망이 크게 작용한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명제는 다시 한번 수정되어야 한다. 한국인은 다른 한국인의 욕망(내 주변 사람들의 아파트, 자동차, 학력, 호캉스, 명품 등)만을 욕망한다.

*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한국인을 이야기하면 남성 또한 포함되니 남근보다는 라캉의 팔루스(phallus)로 표현하는 것이 옳아 보이지만 이 글에서는 단어의 대중성을 고려하여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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