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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Mar 18. 2023

기다림과 분노



토요일이었다. 아내와 외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같은 빌딩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들어갔다. 아르바이트생은 "지금 주문하시면 20분 이상 걸리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불온한 말을 건넨다. 나는 묘한 투쟁의식이 생겨 괜찮다고 하고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아뿔싸, 웨이팅이 있을 줄 알았으면 책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스마트폰이라는 훌륭한 시간 탕진을 위한 도구가 있었기에 약속한 20분은 별 탈 없이 훌쩍 지나갔다. 아내는 지루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20분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30분이 훌쩍 지났다. 무료 주차시간인 1시간의 재고가 금방 바닥날 것 같다. 여기에 주차비까지 내야 한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그러면, 테이크아웃 잔으로 바꿀게." 20대로 보이는 여종업원에게 찾아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며 주문 진행 현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마치 유리잔이라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뜨린 듯 아연실색하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죄송합니다, 주문이 한꺼번에 몰려 주문을 놓쳤어요, 바로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기본조차 지키지 못한 불성실한 태도에 커다란 모욕을 가하고 싶었지만,  곧 나올 음료에 이물질이 들어갈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를 내면 불필요한 음(-)의 감정 소모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로 제작했다는 음료는 5분도 더 지나 나왔다. 아르바이트생은 재차 사과했다. 글쎄, 그 사과는 위기를 모면하려는 제스처로 보이기에 진정성이 없었다. 게다가 주문한 음료는 급하게(?) 나오느라 형편없기까지 했다.


이 작은 소동을 뒤로하고 주말의 허기를 채울 장을 보러 동네 대형마트에 갔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장사가 잘 안되는 곳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내면의 평화를 누린 채 계산대까지 카트를 밀고 갔다. 그런데 이때 내 바로 옆줄에서 고성이 오갔다. 60대로 보이는 초로의 두 여성 간의 싸움이었다. 나는 이제 막 계산대에 와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계산을 마무리하는 사람과 바로 뒤에 줄을 선 사람 간의 싸움이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려?"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으나 반말로 계산을 치르는 사람에게 화를 냈다. 둘 간 무의미한 말이 오간 뒤, 계산을 마치는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할 때 이제 계산을 시작하는 사람이 그녀를 붙잡고 다시 한번 부딪쳤다. 하지만 시비를 당한 쪽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센 육두문자를 내뱉자, 붙잡는 자의 남편까지 가세하여 서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들의 싸움은 마트 직원들이 가세하여 비로소 진정되었다.


인간은 자기와 비슷한 수준이면 시기 질투하지만 이길 수 없는 우월한 존재로 여기면 존경한다고 한다. 싸움의 법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길 수 있을만한 상대에게 시비를 건다. 인간 폭력의 역사를 통계 기반으로 탐구한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폭력은 대체로 전면전이 아닌 급습이나 독살과 같은 야비한 방식으로 벌어진다. 손익비의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도 남편을 포함해 2:1인 상황에서 시비를 걸기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60이 넘은 인생을 살아오며 그녀와 그에게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을까? 그들이 자신이 넘보지 못할 권력자의 횡포에 맞서 분노해 본 적은 있었을까? 약자를 공격하는 일은 미성년자에게 훨씬 빈번하게 일어난다.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자에게 분노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자신이 가진 것, 심지어 목숨마저 버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곧 권력에 순응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들이 비로소 사회화를 시작하는 이유는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배변과 작은 쾌락들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뒤안길에서 비로소 폭군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저질렀던 크고 작은 악행과 부끄러운 실수를 거울삼아 타인의 과오를 눈감아줄 사람이 될 것인가?


사족을 붙이면 쾌락원리에 따르면 쾌락은 바닷물처럼 마실수록 고통스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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