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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Mar 20. 2023

왕자와 거지


최근 유튜브 등 각종 플랫폼을 통해 <지구마불세계여행>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주요 출연자는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 등 유명 유튜버들이다. 1화를 보니 싱가포르에 가게 된 구독자 160만 명의 빠니보틀이 하루 10달러로 여행하기를 기획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예전에 연예인들이 출연해 일주일 간 만 원으로 버텼던 <만 원의 행복>이란 예능 프로그램을 착안했으리라. 선진국이라 여행하기 너무 쉬워서 힘들게 가겠다는데, 나는 실소가 나왔다. 빠니보틀의 광고 수익은 녹스 인플루언서에 따르면 월 2.7~4.8만 달러로 추정된다. 물론 다른 출연자 역시 만만치 않은 수익을 자랑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연봉만큼 매달 버는데, 만 원의 행복을 찍는다는 건,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소설 <왕자와 거지>처럼 왕자와 거지의 신분이 뒤바뀐 설정을 떠오르게 한다. 사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는 비슷한 변주가 많았다. 예능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 1박2일의 나영석 PD가 이런 식의 포맷을 많이 만들어냈다. 즉, 카메라가 멈추면 매니저의 시중을 받고 매달 월세를 받는 건물주 출연자들을 프로그램 안에서는 얼간이처럼 그려내는 그림 말이다.

* 그는 <지구마불세계여행>의 연출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TV나 OTT, SNS를 통해 타인의 '보여진' 삶을 관음 한다. 그게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그들이 겪는 제약사항 아래 왕자에서 거지가 된 이들의 '통제된' 장애에 환호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한 끼를 제대로 못 먹는다고 시청자에게 죄책감은  없다. 그것이 허구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대부분 거지 신세인 우리들은 부자의 옷차림, 부자의 한 끼, 부자의 하룻밤을 흉내 내기 위해 값비싼 명품 백, 오마카세, 호캉스에 카드빚을 지게 된다.


SNS 피드에 올리기 위해 열심히 해시태그(#)추가해가며 사진을 찍었지만, 그 사진은 손 떨리는 카드 매출전표가 숨겨져있고, 방송에서 거지꼴을 하느라 수고한 우리의 부자 연예인들은 그들의 품위에 비해 다소 검소한 광고주의 협찬품들을 올리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이 피드는 진짜 거지들의 통장 잔고를 바닥내는데 일조할 것이다.


즉, SNS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사진과 영상은 헤겔이 말한 '소외의 소외' 개념에 정확히 부합한다. 소외된 존재인 가난한 자가 자신의 삶을 상상 속에 다시 한번 스스로를 소외시켜 자신을 왕자와 동등해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해결책인가! 월급날 밀린 카드 할부금과 대출 이자는 조심해야겠으나 제2의 자연과 같은 스마트폰에서 끊임없이 보이는 이미지들은 우리의 향락(jouissance)으로 남을 것이다.


#무한도전 #1박2일 #지구마불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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