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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Mar 31. 2023

인생의 유통기한

도산 안창호

나심 탈레브가 정초 한 블랙스완 이론은 2008년 금융위기 사건과 같이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지만 한 번 발생하면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건을 겪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은 거시경제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일반적인 가정환경이라고 가정해 보았을 때, 통상적으로 대학교로 대표되는 고등교육까지 진학 후 취업하여 직장을 갖는 것을 삶의 목표로 본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결혼이라든지 출산 등 인생 목표가 재수립된다. 그런데 통상적인 인생의 목표는 영속하는 회사라는 회계적인 가정과 유사하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사주에는 예외 없이 초년 운부터 말년 운까지 나와있어도 천수(통상 40세)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분명 존재하는 것과 같다.

즉, 학업과 취업, 결혼, 출산 등 인생의 경로는 건강하게 생존하는 경우를 가정하고 목표를 수립하는 것이며, 갑작스러운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죽는 경우까지 가정하는 경우는 없다. 개인은 국가 혹은 회사에서 통상적으로 수립하는 리스크 상황 시나리오, 혹은 보험약관의 천재지변에 따른 면책조항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생에 이러한 험난한 파고는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있다. 자신이 언젠가 다치거나, 아프거나, 죽을 것을 가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비참하기에 사람들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망각한다. 그런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안타까운 나이에 나의 은사님, 회사 동료, 가족이 갑작스럽게 생을 마쳤다. 그분들의 부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젊었고 개별적인 중대한 사건으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40대가 넘어서자 불현듯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30대 후반부터 회사에서 차세대 전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서서히 시작된 것 같다. 2년 반 정도 몸담은 40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목표를 수립하는 것도, 달성하는 것도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았다. 시간과 자원은 언제나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시간을 끊임없이 보충해서 프로젝트 완수를 아슬아슬하게 달성했다. 이러한 경험은 조직 구성원인 나에서 내 개인의 목표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시점 즈음하여 나는 40대가 되었던 것이다!

삶이 말 그대로 유한한데, 내 개인적인 목표가 사실상 없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오늘 저녁을 뭐 먹을지, 주말에 뭐 할지 같은 단기적이고 지엽적인 목표가 아닌, 커다란 목표를 세워야만 했다. 그때 취업 준비생 시절에 단골 자기소개서 서술 항목이었던 '5년 후, 10년 후 나의 모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20대 시절 그 질문은 굉장히 막막했는데, 10년 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 선배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다지 먼 미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회사 무탈하게 잘 다녀서 승진하기 정도로는 내 목표로 삼기에는 부적절해 보였다. 왜냐하면 갑자기 내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다가온다면 출근이라는 목표는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 말이다. 당장 생을 마감하더라도 의미 있는 목표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고 싶어졌다.

내가 하루를 길게 보내기 위해 먼저 시작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달리기와 독서이다. 어떻게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스러운 취미인데, 나이를 먹게 되니 먼저 나이 든 그를 닮아가나 보다. 달리기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싫어했던 운동이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강변(한강변 아님에 주의)에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달리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도보 코스를 따라 달리기를 취미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실제로 5km 마라톤도 두어 번 참여를 하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회사에서 다른 지방으로 발령 나면서 기존에 집을 처분하게 되어 달리기는 취미생활 항목에서 제외되었다.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몇 년이 흘러서이다. 계기는 아내의 다이어트 때문인데, 스마트폰 APP을 통해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나에게 같이 참여할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주말에 달리기를 오랜만에 하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그러나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아내보다 내가 더 적극적이 되어 달리기를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던 작년에는 실제로 오프라인 대회에 7km 종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대회를 참여하고 나니 운동 동력을 크게 상실하고 말았다. 한동안의 슬럼프가 이어졌는데, 그 사이 뱃살도 두둑이 올라갔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기존에도 헬스장을 다니면서 근력운동을 하고 있기에 조금 안도했던 측면도 있다. 시간이 지나 겨울이 다가왔는데  출근길에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에 전에 없던 젊은 외국인 여성이 새벽마다 달리기를 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심지어 눈이 내리는 순간에도 그녀의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기에 다시 달리기 위해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마라톤의 가장 어려운 순간은 집을 나서기 전 러닝화 끈을 묶을 때라는 격언이 떠올랐다. 게다가 스스로 정한 몸무게의 마지노선도 한층 나를 압박했다.

그렇게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쉬었던 기간에 비해 크게 페이스가 떨어지진 않았다. 어느 날인가 퇴근하고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아파트 단지 내를 달렸다. 지나가다 나를 본 어떤 이름 모를 아저씨가 "아직 쌩쌩하구먼." 하고 큰 목소리로 격려해 주었다. 나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를 그냥 지나쳤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는데 젊은이는 아닌 것을 알았나 싶어 조금 씁쓸하면서도 뿌듯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달리기가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꾸준히 달리면 목표했던 시간이나 거리에 결국 도달하게 된다. 도착이 가까워질수록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이기에 흘리는 땀이 부끄럽지 않다. 어느 날인가는 10km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다. 비록 레이스에서 꼴찌를 한다 하더라도 슬프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다음으로 내가 목표를 세워 노력하는 것은 독서이다. 원래 책 읽기를 싫어한 것은 아니나 막상 일 년에 몇 권 읽었냐고 묻는다면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여가시간이 있다면 스마트폰이나 PC 게임을 하느라 독서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독서량을 늘리기 위해 했던 수단은 몇 가지 있는데 먼저 독서 목표를 세웠다. 사족을 붙이자면 요즘에는 스마트폰 APP으로 쉽게 관리가 가능하다. 그리고 독서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대중교통 이용 중이거나 대기 시간에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뭔가 모자란 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거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게임을 그만두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라 몇 달간 망설임 끝에 과감하게 정리하자 책 읽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책을 계속 읽다 보니 독서 속도가 빨라져가고 읽는 재미가 붙으니 책 읽는 것이 점점 즐거워졌다. 물론 지금도 철학, 특히 번역서는 읽기 난도가 높지만 그 어려움마저도 일독을 했을 때 뿌듯함을 높여주는 장점이 있다. 비유를 하자면 (로프 없이) 프리 솔로로 암벽을 등반하는데 성공하는 기분이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단기 기억력과 시력이 동시에 나빠지는 중년의 나이에 독서라는 취미를 시작하는 것뿐이다.

전술한 내 취미가 누군가에게는 돈도 안되는 고생이자 노동으로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반복되는 하루가 보람차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니며, 내 의지에 의해 삶이 나아지는 방향이라 생각해서 결정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취미가 생업이 되면 더 이상 취미가 아닌 것처럼, 나는 일련의 행동들이 돈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도 선수가 아닌 이상 달리기로 우승 상금을 받거나 독서왕이 된다고 대접받는 일이 일어날 일은 없다. 다만, 나는 내게 존중받게 된다. 더 이상 나는 내 시간이 부끄럽지 않게 느껴진다. 누군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푸념하면 시간은 만드는 것이라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건 간에 내가 지금 나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낸다면 타인의 인정이 무슨 소용일 것인가? 안창호 선생이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다."라고 말한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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