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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Apr 05. 2023

나의 제주도

레이니 아일랜드(Rainy Island)

제주도와 꽤나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십여 년 전 일이다. 회사 첫 발령지가 무려 제주도였다. 신입사원인데다가 성격 급한 선배를 만난 통에 눈치 없는 나는 너무나 그 시절이 힘들었다. 그렇게 제주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악몽에 가까웠다. 이 섬을 벗어나고 싶어 인사부서에 고충을 신고하고 인사발령 나기만을 학수고대하여 다행히 반 년 만에 탈출할 수 있었다. 내 노력 덕분에 짧은 제주살이가 되었지만 남은 기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살다 보니 인터넷카페를 통해 직장인 모임을 나가기도 했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처지는 거의 없고, 제주도 토박이들이 십여 년간 운영한 동호회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육지에서 온 나를 배척하지 않고 환대해 주었다. 또 한 편의 기억은 택시에 지갑을 두고 내린 사건이다. 급하게 카드 정지를 시켰는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심지어 현금이 꽤 들어있었는데 돈 한 푼 가져가지 않았다. 택시 운전기사 연락처를 경찰에게 물어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괜찮아요. 여행 오셨는데 좋은 기억으로 남으셔야죠."라고 손사래쳤다. 나는 여행 온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내게 커다란 좌절감과 소소한 행복을 안겨준 양가감정이  충만한 제주도를 이후 몇 년에 한 번꼴로 놀러 간 듯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때의 슬픔은 잊힌지 오래이다. 제주 시내에 예전에 근무했던 곳을 지나치면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 것을 보면 "추억은 미화된다."라는 격언을 새삼 깨닫게 된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 듦의 증표가 아닐까 싶다.


3월 말에 이르자 벚꽃이 봄을 알리는 시절이 돌아왔다. 이틀 정도 휴가를 내고 처음으로 아내와 장인, 장모님, 처남과 같이 제주도행 비행기를 탑승했다. 장인과 장모님 내외의 나이는 어느덧 70대 중반에 이르렀다. 중년의 나이에 가까운 처남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노약자를 모시고 하는 여행은 계획 수립부터 쉽지 않았다. 사실상 여행 코스는 식사를 제외하면 한두 곳에 한정되었다. 이렇게 적게 돌아다니면 여행이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첫날을 같이 보내니 여행 계획을 줄이길, 동선을 축소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첫째 날 함덕해수욕장에 들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진 않았으나 날씨가 꽤나 흐렸다. 덕분에  이국적인 해변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바다의 일상 같았다. 앉을 자리가 필요해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와 빵을 시켰다. 이미 좋은 자리는 다른 이들이 선점했고, 간신히 앉은 자리에 전투적인 마시기와 먹기가 시작되었다. 처가 식구들의 사진촬영을 마친 후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테마공원에 갔다. 이곳은  60~70년대를 다소 익살스럽게 재현하여 장인 장모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긴 소요 시간이었다. 관람은 제쳐두고 앉을 자리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으셨고 이 상황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남은 소소한 일정은 전부 취소하고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은 유명한 수족관인 '아쿠아 플라넷'이다. 이 여행객들은 첫날보다 좀 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관람하였지만 다시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동선이 짧은 편이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인해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이들에겐 숙소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여행을 뜻하는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이다. 언제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는 위험한 고대의 어느 여행 못지않게 나를 따라온 이들에게 고통을 선사한 것 같아 다소 후회가 들었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하루가 더 길었다면 정말 아찔할 뻔했다.


마지막날 장인 장모님과 처남의 비행기 체크인을 도와드렸다. 탑승 대기열에 노약자 우선줄이 있길래 찾아갔더니 젊은 직원의 부주의로 다른 줄을 서라고 했다. 이 과정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가 말한 다른 줄에 갔더니 이번엔 중년의 직원이 노약자 줄로 가지 그러지 않았냐고 말했다. 아내가 항의하자 젊은 직원은 제 잘못인 걸 알았음에도 그다지 인정하지 않고 멀뚱하게 쳐다만 보았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잘 버티던 장인어른은 결국 주저앉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이에 비해 매우 건장했던 장인의 강철 체력은 온데간데없고,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탑승구에는 등이 굽은 그의 뒷모습이 남아있었다.


젊은 시절 힘겨운 나날을 보낸 나를 말없이 반겨주었던 이 섬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르니 순례길로 바뀐 듯하다. 공교롭게도 이 여행과 비슷한 시기에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소설집 중 <레인트리> 연작이 떠오른다. 작가는 우연히 하와이의 기묘한 세미나에 참석해 보았다는 빗물을 잎에 머금고 있는 신비한 나무를 메타포(metaphor, 은유)로 일련의 글을 써나갔다. 내게 비 내리는 제주도는 자체로 거대한 메타포로 다가온다. 앞으로 마주할 이 섬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나와 같은 공간을 점유했던 내 여행객들에게 제주도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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