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노라

빛이었던 누군가를 위로하노라

by 윤슬


영화나 드라마에서 신분과 계급 문제는 지속적으로 다뤄지는 주제다. 고전은 물론, 형식상 신분제도가 사라진 이 시대(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이 오히려 신분과 계급 질서를 더 공고하게 구축하긴 했지만)의 현대물에서도 이 주제는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변주되고 있다. 특히 멜로드라마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영화 <아노라> 역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느 여성 스트리퍼와 철딱서니 금수저 남자가 서로 잘 맞아 충동적으로 결혼을 한다. 남자의 부모가 찾아와 둘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며 그 결혼을 무효로 돌리기 위해 애를 쓴다. 남자는 여자를 나 몰라라 하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사실 시놉시스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에서 매일 보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들에서 주요 상을 휩쓴 사실을 생각하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차별성이 있기에 그토록 상찬을 받는 걸까.


anora2.jpg 철부지 금수저와 스트리퍼는 일주일 동안 계약 연애를 한다.


감독 숀 베이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고작 일주일의 단꿈으로 진실한 사랑이 맺어질 거라는 환상이나 프린스 차밍에 대한 소망이 깨진 다음의 이야기를 펼쳐내려 했다.”


이 영화는 크게 보면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은 여주인공 애니(아노라)와 남주인공 이반이 만나서 일주일 동안 섹스와 마약과 향락을 즐기다가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2막은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남자의 어머니가 보낸 고용인들이 들이닥치고, 그들을 피해 달아난 이반을 찾아다니기 위해 밤새 벌이는 소동극이 펼쳐진다. 3막은 남자의 부모가 미국에 도착해서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위에서 언급한 감독의 의도가 잘 살기 위해서는 1막의 구성을 지금보다 더 간결하게 구성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량이 불필요하게 길다. 그래서 1막까지만 본 사람이라면, 그렇고 그런 오락영화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anora3.jpeg 두 사람은 충동적으로 결혼을 한다.


이반이 청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애니에게 이반은 그저 돈을 받고 일주일 동안 놀아주는 파트너에 불과했다. 하지만 초절정 금수저인 그가 청혼을 하자 신분 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들을 갈라놓기 위해 애를 쓰는 고용인들에게 악을 쓰며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습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의 한바탕 흥취에서 깨어난 듯 이반이 그녀에게 하는 말. “고마웠어. 내 마지막 미국 여행을 재미있게 만들어줘서”라고 하자, 그녀 역시 달콤 쌉싸름한 봄날의 꿈같았던 시간에서 퍼뜩 깨어나 자존감을 회복한다.


anora6.jpeg 줄곧 동등했던 두 사람의 시선의 높이는 후반부에서 명징하게 높낮이를 드러낸다.


3막에 이르면 영화의 시선은 이반보다, 그의 부모가 고용한 사내들 중 한 명인 이고르에게 옮겨간다. 애니가 남자의 부모에게 언어폭력을 당할 때, 이반의 말에 지푸라기처럼 무너져 내릴 때 카메라는 종종 이고르를 단독샷으로 잡거나 애니와 함께 투샷으로 잡는다.

이반과 그의 부모가 대화를 하는 동안 오히려 카메라는 애니와 이고르를 포착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더 크게, 이반과 부모의 대화는 저 멀리서 작게 들려온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하층민인 두 사람이 주류가 되고, 상류층인 사람들이 서브가 되는 계급성의 전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들 중 주목해서 볼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반의 집 거실에 놓여있는 유리 탁자. 이 유리를 끼워놓은 조각은 벌거벗은 여성의 형상인데, 매우 힘겨운 자세로 유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상류층을 위해 불편한 자세로 노동하는 하층 계급의 형상 그대로다. 집사격인 토로스가 애니를 공격할 때, 그녀가 그를 발로 걷어찰 때 이 유리 탁자는 깨져버린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았던 노동으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켜 준 것이라고 보며 지나친 해석일까?


anora7.jpg 노동하는 하층 계급을 형상화한 유리탁자가 아노라의 발길질에 깨진다.


또 다른 주요 소품은 빨간 머플러인데, 하층 계급이자 약자로서 두 사람의 연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저항하는 애니의 입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머플러인데, 찬바람 부는 밤거리를 상처받은 고양이처럼 웅크리며 걷는 애니에게 이고르가 머플러를 목에 두르라고 한다. 애니가 앞에, 이고르가 뒤에 서서 걷는 이 장면에서 머플러는 두 사람을 유대감으로 묶어주는 끈이다.


anora5.jpeg 약자인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연대의 상징인 빨간 머플러


영화는 이고르의 개인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이름의 뜻이 ‘전사’라는 것에서, 그는 태생적으로(물론 영화라는 태 안에서) 누군가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어쩌면 그의 고향에 애니와 같은 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고르라는 이름의 뜻을 말한 후 갑자기 그들은 불어 ‘투세이(졌다)’를 말한다. 그래서 영화는 아무리 두 사람이 계급투쟁을 그악스럽게 해 봤자 결국 상류층 기득권을 이길 수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한편 애니의 본명 ‘아노라’는 ‘빛’이며 ‘밝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사코 가명인 ‘애니’를 고집한다. 그녀는 밝게 빛나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춘 채 any(어떤, 아무, 누군가)라는 익명성 뒤에 숨고 싶었던 것 같다. 빛나게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빛의 뒤안길에 숨어 사는 자신의 삶을 차라리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 같다.


단 며칠간 허락된 천국의 삶에서 한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마음이 으깨진 그녀에게 잊으라는 듯, 다 덮으라는 듯 함박눈이 퍼붓는다. 그 눈을 배경으로 오열하는 아노라의 모습이 처연하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틱틱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