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쓰라는 잔인한 희망 고문
장르를 불문하고 창작자의 숙명은 거절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창작품을 어딘가에 제출하고(혹은 시연하고) 그것의 평가를 기다리고 선택받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단하고 씁쓸한 일이다. 사실 그 작품을 평가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선택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운에 좌우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짓 그만 때려치울까’ 싶다가도 한 번 발목 잡힌 인생, 쉽게 빠져나오기도 힘들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해 보면 될 것 같아서 포기할 수 없다. 배우고 경험해 온 일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다른 일에 도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영화 <틱틱붐>은 뮤지컬 <렌트>로 사후에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조너선 라슨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다. 실화 중에서도 그의 성공기가 아닌, 무명 시절의 뼈 아픈 실패담을 그리고 있다.
그는 서른 살 전에 자신의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야무진 꿈 하나로 버티며 낮에는 식당 웨이터로 일하고 밤에는 창작 작업에 매달린다. 전기요금을 못내 전기마저 끊겨버린 낡고 비좁은 아파트에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무려 8년 동안 쓴 뮤지컬을 마침내 워크숍에서 발표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 정식으로 무대에 올리기에는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는 조너선. 한마디로 청천벽력이다.
-그럼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죠?
-계속 써.
‘계속 써’ 타격감 100%의 이 짧은 말에 모든 창작자의 형벌 같은 운명에 대한 정의가 응축돼 있다. 오늘 발표한 작품이 잘됐다고 해서 다음 작품도 잘되라는 법은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다시 공부하고 대중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내고 관계자들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고 평가받는 과정만이 도돌이표처럼 계속될 뿐이다(저작권이 발달한 음악계에서는 노래 하나만 뜨면 평생 연금처럼 먹고 산다고 하니 예외일 수도 있다).
얼마 전 어느 메이저 드라마 제작사에 작품을 보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이 바닥 표현으로 ‘까였다’). 은근히 기대를 했던 터라, 잔뜩 부푼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간 듯 허탈하고 우울해져서 방송 작가들이 모여 있는 카페 게시판에 넋두리를 써서 올렸더니 위로의 댓글들이 몇 개 달렸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댓글 하나.
“잘 싸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맞아도 빨리 일어나는 사람이 오래갑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맷집’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맞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단박에 똑바로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몸은 물론 마음까지 휘청거린다. 어쩌겠나. 창작자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 종종 생의 문턱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며 살아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