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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회복되(하)지 못하는 사람들

by 윤슬

한강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작품을 막론하고 일정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주인공들은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통이란 화톳불을 껴안고 사는 인물들이어서 독자들은 그 불에 어느 정도는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소설이란 본디 크게 나눠보면,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 불화, 대결을 토대로 이뤄진다. 한강의 작품들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정도를 제외하면 대개 후자에 속한다. 단편소설집 <노랑무늬영원>도 그중 하나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인(밝아지기 전에), 가족(회복하는 인간), 친구(에우로파), 남편(훈자, 노랑무늬영원), 연인(파란 돌, 왼손)과의 관계에서 소외를 겪고 그에 따른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주인공과 특정 관계에 있는 인물들은 육체적 고통으로 힘겨워하고 주인공은 그들과 끝내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어찌 된 일인지 그 인물들과 적극적인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관계 사이의 소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미혼 시절 언니가 소파수술을 할 때 동행했던 주인공은 이후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언니가 투병 끝에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안)한다(회복하는 인간). 그리곤 자학하면서 자신이 겪는 고통으로부터 회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무능한 남편과의 소통 부재, 빠듯한 살림살이에 지친 여자는 ‘훈자’라는 파키스탄의 아름다운 산간 오지마을을 찾아가는 꿈을 꾸지만 끝내 그것은 꿈으로만 끝나고 만다(훈자).

서로에게 영혼이 끌렸으나 죽음으로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한 회한(파란 돌), 뜻밖의 교통사고로 양손을 거의 못쓰게 된 여자와 남편 사이에 생겨버린 균열(노랑무늬영원)도 역시 극복되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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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어긋난 관계 안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과거의 한때 스쳤던 인물과 새롭게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현대 대중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못내 그 관계의 극적 회복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강은 끝내 그 관계조차 이어주지 않는다(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그래서 독자는 이 단편들을 읽고 나면 자칫 답답한 느낌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고통을 통한 카타르시스’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모름지기 카타르시스는 안에 쌓여있던 무엇이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강의 작품들은 내러티브(사실 단편소설 안에서 내러티브를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지만) 보다 종종 이미지의 자장 안에서 해독해야 할 때가 있다. 한강은 아마 미술 분야에 꽤 조예가 깊은 듯 그녀의 인물들 중에는 유난히 화가가 많거나 그림에 재능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독자는 소설 안에 제시된 그림이나 이미지를 통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지엽적인 부분이지만, 한강의 작품들에서 종종 작가가 성 역할에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듯한 문장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은 문장들(따옴표는 필자가 붙인 것임).


-촌사람이었던 그는 ‘사내답지 않게’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반짇고리를 꺼냈다(122쪽).

-당신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도무지 ‘남자 같지 않았으니까요’. 마치 ‘이모처럼’ 접시에 고구마를 내오고 물을 갖다 주고는(138쪽)


한강 작가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여서 그런 걸까. 요즘 'PC주의'에 익숙한 세대에게 이런 문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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