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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세웅 Jun 16. 2021

신의 한 수

가장 좋은 수를 만지작만지작

바둑을 두는 일과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살리는 일은 여러 측면에서 닮았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두뇌 싸움, 여러 가지 수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수를 생각하는 것, 어떤 결정에 따라 치명적인 패착이 되기도 하고, 신의 한 수가 되기도 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바둑은 대국 후에 승패가 나뉘고 상금의 규모가 달라지겠지만, 중환자실에서는 환자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점이다.


중환자실에서 가장 좋은 수를 두기 위해서, 의사와 간호사는 한 팀이 되어 경기에 임한다. 8시간 교대 근무로 24시간 내내 환자 곁을 지키는 간호사가 환자의 몸 상태가 보내는 수많은 징후들을 감시하고 판단을 내리기 적합한 자료를 취합한다. 동시에 모든 환자를 볼 수 없는 의사는 간호사가 알려주는 자료를 신뢰하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결정을 내린다.


나는 흉부외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므로 심장을 예로 들면 혈압이 적절히 유지되고, 투여되는 volume이 충분한데도 소변량이 줄어든 상태면 이뇨제를 한 번 써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의사에게 알리기도 하고, 갑자기 환자의 맥박이 부정맥으로 바뀔 경우 부정맥을 교정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몸속 전해질을 파악하는 검사를 나가서 심장을 잘 뛰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전해질이 충분한 지 확인해보자고 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경우는 흔한 편이라서 결정을 내리기 쉬운 편에 속하는데 문제는 환자의 중증도가 올라가는 경우다.


중증도가 올라간 환자의 몸이 의료진에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사인을 계속 보낸다. 맥박과 혈압의 변화, 소변량 감소 등 심장 상태의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다른 기저질환 혹은 수술 후 신장의 상태가 악화된 경우 신장의 상태를 고려해서 약물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수를 생각해보고 환자의 몸에 최소한의 영향을 주면서도 회복하는데 효과적인 수를 고민하고 결정하며 치료해나간다. 그 과정 가운데 환자 곁을 지키다 보면 마치 외줄 타기를 하듯 환자의 상태가 호전됐다가, 변화가 없다가, 악화됐다가를 반복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세돌 바둑기사가 알파고를 상대로 4번째 대국에서 보여준 78 수처럼 그 타이밍, 그 수가 아니었다면 살릴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환자가 결국 회복되었을 때 환자도, 보호자도, 의료진도 모두 안도하고 기뻐하고 의욕도 더 생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수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하고 두었던 수가 환자의 상태를 회복시키는데 아무런 힘을 못쓰는 평범한 수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어떤 수를 두어야 하는지 막막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 곁을 떠나려고 돌아선 차가운 환자의 몸상태는 우리가 둘 모든 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어떤 수를 써도 살릴 수 없게끔 더 강력한 수를 둔다. 산, 염기 균형이 완전히 깨지고 산증이 심해져서 약물의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몸상태, 수혈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출혈이 돼서 속절없이 떨어지는 몸속 헤모글로빈과 혈소판 수치,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인공호흡기도, 혈액투석기도, ECMO도 동원해서 치료해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에게 더 고통만 주는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에는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


"혹시 보호자 분들이 병원에서 얼마나 떨어져서 계시죠? 지금 전화해서 최대한 빨리 병원에 와달라고 연락해주세요."


상황을 지켜보던 주치의 선생님이 정적을 깨고 말을 꺼냈다. 환자에게 더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 신속하게 일을 해나가지만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때가 온 것임을 알기에 비통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코로나 시대에 가족들과 면회도 어렵고 낯선 중환자실 환경에서 환자분 스스로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무섭고 두려우셨을까. 가족들은 환자분에게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 힘든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더 많이 사랑하고 추억을 쌓아나갔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죽음을 직면하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앞으로도 중환자실에서는 환자 한 명을 살려보겠다고 의료진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가장 좋은 수를 생각해내며 수많은 신의 한 수를 두는 경기가 펼쳐질 것이다. 비록 모든 환자를 살려낼 수 없고 환자가 죽어가는 순간을 마주할 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알파고를 상대로 한 경기를 이겨낸 이세돌 바둑기사를 보면서 기쁨과 감동을 느끼기도 했지 않는가. 환자를 살려낼 가장 좋은 수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중환자실에서의 경력이 쌓이는 만큼 실력도 많이 쌓여서 질병을 상대로 신의 한 수를 두어 승리하는 경기가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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