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불행 앞에서
땀에 젖은 유니폼, 헝클어진 머리, 피비린내가 풍기는 환경에서 또 한 명의 죽음을 목격한다. 환자 곁에서 끼니를 거르고 잠을 참고 땀을 흘렸던 시간,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했던 시간만큼 의료진들이 느끼는 슬픔의 깊이와 무게는 비례해서 더 깊고, 무겁다.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상황들을 겪지만, 죽음이라는 녀석은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애초에 쉽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아직 젊은 나이인데 왜 벌써?' 라며 탄식하기도 하고 '그동안 너무 고생만 하시다가 가시는 건 아닌지.'라며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또한 살려는 의지가 확고하고 어떻게든 힘든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환자분의 모습에 반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릴 수 없었던 상황을 떠올릴 때면 환자분에게 너무 미안하고 이 상황이 너무 애통하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너무 힘드시죠?"
평소에도 심성이 착한 의사 선생님께서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환자 곁을 지킨 모두가 비통하고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고 참 속상하기에 의사 선생님께서 침울해 있던 동료의 모습을 공감하고선 마음을 헤아려주셨다. 이어서 진심으로 환자와 가족들의 슬픔을 헤아리고 함께하는 한편, 마음을 잘 추스르고 또 다른 환자분들을 살려야 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며 격려해주셨다. 모든 사람들을 살릴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묵묵히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라며...
심장을 다루는 부서의 특성상, 정기적으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는다. 동료의 말로는 자신이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마침 심장과 관련된 중환자실 선생님들이 다수 참석했다고 했다. 강사 선생님도 명단을 보고선 응급상황도 많고 많이 힘들실 것 같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고 했다. 그리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말을 덧붙여 주셨는데 동료는 그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심장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다 보면 때론 죽음도 자주 마주치고 그 과정 가운데 지치고 무력함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도 전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하고 계십니다."
상황을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느 직장인은 주어진 과제를 책임감 있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꽉 막힌 상사로부터 납득할 수 없는 질책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느 누군가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일터를 지켜야 하는 착잡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때려치우고 싶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속상하고, 하기 싫은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모습이 아니고,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 또한 너무 버거워서 할 수 없더라도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고 올바른 삶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분명히 힘든 순간 함께하고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시간이 흘렀을 때, 지난날 경황이 없어서 알지 못했던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 좀 더 성숙해져서 타인을 품고 위로해줄 수 있는 격이 높아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 또한 성장과정 중에 나이에 맞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고, 웃음을 잃었던 적이 있었으며, 훗날 내 아픔이 타인을 좀 더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랑하는데 필수적이었던 시간이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불행 앞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마음 뺏기지 않기를,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 살아가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