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필요한 이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각자의 하루는 마치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문처럼 단 하나도 똑같은 하루가 없을 것이다. 일어날 때부터 상쾌하고 계획했던 일들이 술술 이루어지는 기분 좋은 하루부터, 알람을 미처 듣지 못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부터 분주하고, 물건은 떨어뜨리고, 기분이 나빠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하루까지, 각자가 감당해내는 하루의 모양은 다르다.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면서 좋은 일보다 좋지 않은 일의 빈도가 잦아질 때면 '지금 겪는 이 시간들도 훗날 되돌아봤을 때 누군가를 더 공감하며 진실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자산이 되겠지.'라며 나는 거의 무조건 반사와 같은 반응 속도로 생각한다. 아마도 그건 어렸을 적 겪었던 수많은 힘듦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방어기제가 발달된 것일 수도 있고, 그동안 지나온 삶 가운데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진실된 위로로 전해졌던 경험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힘든 순간들이 꽤 많다. 환자를 돌보는 일에서 보람도 느끼고 다시 힘을 내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수한 상황 가운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어디 말도 못 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진 채 근무를 이어나갈 때가 있다. 만약 하루에 100개의 주어진 일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누군가를 간호하기 위해서 나머지 99개의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직접 일을 시작하기 전엔 몰랐다.
해야만 하는 일들을 떠올려보면 때론 나의 감정보다 누군가의 감정을 더 우선시하여 부드럽게 받아주어야 할 때도 있고,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긴급하고 중요한 수많은 일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서 주어진 시간 내에 하나씩 쳐내야 하고, 그 사이에 밀린 일들도 다음 사람에게 인계를 주기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 간호사로서 병원에 입사하여 보낸 첫 해는 어느 하나 잘하는 게 없고, 제시간에 일을 마친 기억이 거의 없다. 명절 때와 같이 수술이 없어서 환자가 거의 없을 때를 제외하곤 늘 그랬다. 그때는 일을 제대로 못하고 제시간에 마치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역량 부족인 것 같아서 자책도 많이 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근데 햇수로 5년째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지금은 5년 전 나의 역량 부족 때문에 힘들었다는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환자 파악도 잘 해내고, 일하는 속도도 빨라진 지금도 여전히 근무할 때 밥도 못 먹고, 간호 기록도 못 넣고, 해야만 하는 일만 하다가 끝나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도저히 살릴 수 없었던 환자도 발전한 치료와 돌봄 덕에 저승사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살려낸다는 점에서는 환자 및 보호자 분들에게 희망이 있는 부분이지만 그만큼 중환자의 중증도는 극악스럽게 올라갔다. 중증도가 무척 높은 환자 한 명에게 필요한 전인 간호와 질 높은 간호가 이루어지려면 무척 손이 많이 가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중환자실 간호사가 중환자 1명만 배정받아 간호하는 병원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실력이 쌓여도 간호사는 계속 바쁜 것이다.
간호사로 일하며 바쁜 상황을 마주쳐서 우선순위를 정할 때 가장 밀려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이다. 이건 간호사만 해당되는 건 아니고, 사람을 대하는 무수히 많은 직업이 대부분 그럴 것이다. 상대방에게 하나라도 더 좋고 최선의 것을 해주고자 '나'는 잠시 뒤로 미뤄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밥을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겨우 가고, 조금의 휴식도 사치라고 느껴지는 근무환경 속에 처해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수많은 간호사가 오늘도 병원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내게 아직 병원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묻는다면 여러 비결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상황을 알아주는 동료들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정말 힘들었겠다.', '고생했어.'와 같이 누군가의 상황을 깊이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는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다. 문제 상황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알아준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공감이 필요한 이유고 공감의 힘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상황을 헤아리고 내 마음을 알아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내게 건네줬던 그 말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고 나 또한 누군가를 공감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존재로 성장하게끔 이끌어줬다.
오늘 밤 근무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힘들고 지쳐있는 동료들에게 단비와 같은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