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이토 히로부미의 불안
살을 에는 북반구의 바람, 손대면 달라붙어버릴 것 같은 얼어붙은 건물들, 나라 잃은 자들의 유보된 감정, 희망을 의심하는 관성, 이를 다그치는 동지들의 피, 검푸른 심연을 닮은 스크린은 아름답고 고통스럽다.
나라를 잃었다는 건 어떤 심정일까. 아무리 정교하게 생각하고 붙들려해도 꿈의 끝자락.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그들의 실존 양태를 사특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해하지 못한다. "조선에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데 고마움을 모르고..."
힘과 자본의 바탕 위에서 재편집되고 있던 무기력한 땅들과 토착민들, 그것들을 바둑돌처럼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토는 조선인이 불편하다. 어리석은 왕과 유생들이 끌어들인 환란, 이를 매번 수습했던 민중, ‘늙은 늑대’는 그 힘의 출처가 궁금하다.
"300년 전에는 이순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으니까요." 부하의 이런 말에도 이토는 안심하지 못한다. ‘특출 난 영웅’과 다르게 빛도 이름도 없는 ‘존재들’ 때문이다. 밟아도 밟아도 으스러지지 않고 끝내 꽃을 피워내는 이 지긋지긋한 들풀들, 이토는 그것이 두렵다.
이상과 이성
게릴라전에서 승리한 중근은 일본군 소좌 '모리'를 포로로 삼는다. 하지만 그는 만국공법에 따라 부상당한 자를 석방한다. 모리는 자결을 바라지만 거절당한다. 수많은 동지들을 잃어 분노에 찬 창섭은 원수를 당장 죽여야 한다며 격렬하게 반대한다.
독립운동의 최대의 적은 일제에 버금가는 밀정. 거사를 며칠 앞두고 동지를 의심해야만 하는 창섭은 그를 배제하면 임무를 그만두겠다는 중근과 또 부딪힌다. 모리를 석방할 때와 같은 신념들의 충돌. 그러나 동지에 대한 중근의 믿음은 다시 배반당하고 그는 자신을 심판대에 올린다.
죽음
살려준 모리의 반격으로 몰살당한 부대, 홀로 살아남은 중근, 그는 죽은 동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 거기까지 이토의 목을 끌고 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결정에 대한 참회. 말하자면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다.
그는 이 사태의 원흉을 처단하는 것으로 자기 몫을 하고자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나라를 빼앗긴 자의 정당행위이다. 다만 ‘늙은 늑대’를 잡는다는 건 그 무리에 들어가야 가능한 일. 따라서 그는 반드시 스스로가 죽어야만 한다.
용서
영화 ‘암살’, ‘밀정’에서도 인물의 핵심 구도는 독립운동가ㆍ일제ㆍ밀정이다. 특히 독립투사는 특정 인물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헌신한 민중을 포함한다. 민족의 적인 일제와 밀정은 그들 손에 처단되어야 한다. 이는 그 시대를 그리는 영화의 미덕이다.
‘하얼빈’은 독립 영웅들의 ‘리벤지’ 구도를 이끌며 앞선 영화들의 맥을 잇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의 영웅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다. 전장에서 행한 중근의 '관용'은 비현실적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찢긴 자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품격.
하지만 중근은 적장과 반역자의 마음에 ‘용서’를 심는다. 명예로운 황군이라고 자부한 모리를 법에 따라 석방한 자는 다름 아닌 ‘조센징’. 거짓과 야만성이 탄로 난 순간, 모리는 중근을 집요하게 추격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반면 죽임을 면한 밀정은 일제의 사냥개 노릇을 뿌리치고, 모리의 목에 칼을 찔러 넣는다. 그는 생각했다. 안중근이 그랬던 것처럼 앞서 간 동지들을 따라 죽겠다고. 그에게 용서는 밀정에서 독립투사로 회심이었다.
모순적 아름다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자들은 숭고하다. 이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적 도덕적 감각이다. 안중근에 드리워진 거대함과 압도감 말이다.
용서와 복수, 기개와 두려움, 실책과 반성, 피 끓는 몸에서 피어난 모순적 아름다움. 살려야 할 생명과 죽여야 할 생명, 야만과 존엄 사이에서 끝없는 고뇌. 마침내 이토를 저격하고 외쳤던 중근의 절규에서 인간 너머의 ‘그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