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적인 완벽주의자에서 거시적인 낙천주의자로
뚱이는 스펀지밥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불가사리다.
이 불가사리는 아주 낙천적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심각하게 걱정하는 일이 드물다.
그냥 흥미롭게 바라보며 심각한 스펀지밥의 옆에서 결과를 송두리째 바꿔버리기도 한다.
내 별명이 뚱이인 이유도 어쩌면 이와 같은 결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놀랍게도 과거의 나는 아주 피곤한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어쩌면 어두울지도 모르는 과거도 찬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뚱이를 만든 그냥 그저 그런 사건을 회상해보려 한다.
고등학생 시절까지의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누구에게도 흠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고, 실제로도 잡히지 않았다.
예의 바르면서도 잘 놀고, 선생님들을 골탕 먹이면서도 공부는 잘했던 전형적인 재수 없는 아이였다.
내신 성적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모의고사 성적은 항상 전국 1%대를 유지했으니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가장 중요하다는 고3 여름방학에 면허를 따러 다녔을 때에도 오히려 잘했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건은 수능성적 발표날이었다.
가채점과는 달리 수시전형 최저학력기준조차 만족하지 못한 성적표를 받았다.
당연히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나였지만, 주변에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하나의 과장 없이 선생님들은 사기꾼이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느니 하는 얘기를 했다.
부모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두 분도 선생님들의 얘기에 그냥 그렇게 하라고 동감하셨다.
당시 나는 정말 내가 없어지는 게 맞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좋지 않은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사람은 3일 동안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존에 문제가 생긴다는 정보를 떠올리며 나름대로 완벽하게 사라지고자 했다.
마지막 6일째에 외숙부가 배드민턴이나 치러 가자고 끌고 나가셨지만, 6일 동안 물조차 마시지 않은 사람에게 대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당연히 스윙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고 왜 그러는지 추궁하는 숙부께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았다.
별다른 말씀을 하시진 않으셨지만 난 이때 '아, 그 어떤 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정말 이율배반적으로 동시에 '세상 하직하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이 정도의 각오로 하면 뭔들 못할까'라는 생각도 같이 했다.
이 날이 천성 자체가 낙천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내 인생 가장 큰 사건이다.
물론 운동하고 오랜만에 먹은 국밥이 너무 맛없어서 슬펐던 사실이 더 크게 남은 것 같기도 하다.
대학생 시절 연구에 매진하던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미시적인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만찬이라는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그림 전체를 보지 못하고 식탁 위 식기 하나만 보고 있던 셈이다.
식기를 원형에서 사각형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연히 성공한다 해도 전체적인 그림의 의미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어느 날 우연히 토마스 쿤이 저술한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해당 책에서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대략 '어떤 한 시대에 통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곧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과 후로 전화받는 시늉을 하는 손모양이 개념적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겨우 식기 하나를 바꾸려고 했다니.
정말 큰 충격이었다.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전체적은 그림을 먼저 보는 연습을 했고, 내게 주어진 일이 큰 흐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하는 능력을 길렀다.
최후의 만찬에서 식기의 모양을 바꿔도 의미가 변하지 않지만 식탁 위의 포도주를 식혜로 바꿔버린다면?
식탁을 이스라엘의 그것이 아닌 원탁으로 바꿔버린다면?
다 빈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의미의 그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후에는 어떤 것을 바꿨을 때 결과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쉬워졌다.
되려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조급하지 않게, 그러나 반드시 된다는 확신으로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행동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조금씩이라도 변화가 보이면, 그걸 재미없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엄청난 사건과 사고가 있더라도 내가 누구인지는 결국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가슴속에는 도화지를, 손에는 물감과 붓을 들고 있다.
물론 내 손의 붓으로 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는 지나가며 내 도화지에 그냥 낙서를 그릴 수도 있고, 어떤 귀인은 엄청난 걸작을 남길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지만 액자를 어디에 갖다 댈지는 오롯이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내가 앤디 워홀의 작품이 될지, 어린아이의 낙서로 남을지는 내 선택과 행동이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