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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r 16. 2017

자부:심

내 안의 결핍을 감추기 위한 또 하나의 마음

자부:심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




얼마 전 어떤 방송 프로그램에서 올 해 대학교에 입학한 유명인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대한민국의 정기 교육 시스템에 맞추어 제 나이에 학교에 들어 간 친구도 보였고, 연예 활동을 하느라 해외 활동이 잦아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리고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업에 대한 열망이 남아 신입생이 된 여자 가수도 있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나의 엄마와 같은 나이에 학생의 신분으로 환갑을 맞이 할 아저씨도 계시는 게, 여태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교복 입은 어린학생들의 모습 만을 대학 새내기의 모습이라고 떠올리던 내가 괜스레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부끄러운 시간은 잠시 뒤에 사라졌지만, 방송에 새내기라고 출연한 유명인 중의 한 명이 계속해서 꺼내는 이야기는 또 다시 그녀에 대한, 또 그녀의 까마득한 선배 뻘인 나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게 된 학교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에, 그렇게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다는것에 자부심이 생긴 건지 사소한 의문이 들다가도, 이어서 학교의<학식>이 맛이 좋다는 언급을 하며 학교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 놓으니 이건 본인이 다니게 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틀림 없다. 어떻게 자랑할 게 없어서 학식을 자랑하냐며 "어휴, 쟤도 참"이라고 읊조렸다.


학교는 그녀에게 언제 저렇게 자부심을 심어준 걸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녀처럼 소위 학교부심에 사로 잡혔던 발칙한 시간이 있었다. 다른 학교의 남학생과 소개팅이나 미팅을 하거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간만에 동창들을 만나거나, 친척들이 모이는 행사나 명절에 갈 때면 "저 외대 다녀요"라는 걸 입으로 뱉거나 얼굴에 적어두고 다니는 사람이 나였다. 유독나이트 클럽에 가서 처음 보든 사람들과 일명 <부킹>이라는것으로 만남을 가질 때 "저 외대 다녀요"라는걸 말하고 나면 괜히 내가 공부도 좀 하는 편인데 노는 것도 꽤나 잘하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 같아 자주 써먹곤 했었다. 정작 상대방의 생각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합격을 기대했던 몇 군데의 대기업 취업에 줄줄이 최종 면접 후 탈락을 맛봤다.

"왜? 나는 외대나온 여자인데?"

"SO WHAT?"

"......"





몇 년 뒤, 대한민국의 대기업 중의 한 곳에 신입사원이 되고 난 뒤에나의 <학교부심>은 희미 해져갔다.

어렵게 대기업에서의 사회 생활을 시작하자 "저 CJ 다녀요"로, 소속에대한 자부심이 학교에서 기업으로 자연스레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그러니 간혹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학교를 언급하는 자리가 없을 때면 일부러 학교부심을 들어낼 필요도 없었고, 이미 내 몸 속에는 학교에 대해 자랑 거리라고 생각하던 세포들은 소멸한 뒤였다. 어리석은<직장부심>과 내 인생의 마라톤에서 그저 바톤 터치를 했을 뿐이다.



회사를 그만 두고 나서도 "나 어디 다녔었어."라고 언급하던 시간이 잠시 있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않았다.

프랑크푸르트에 건너가 열 달 남짓을 지내면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고, 또그게 발판이 되어 영국에서의 생활도 일년 반을 이어갔다. 어디에서 일하고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무슨 일들을 해 왔는지, 누군가와 사랑을 했었는지가 지금의 나, 또 앞으로의 나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앞으로 내가 갖게 될 수 많은 가치와 비교하여 한 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바다를 본 사람은 호수를 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 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일을 위해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등에 나라는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사는 것을 일깨워 줬다. 그러니 내가 가진 어떤 특정의 무엇에 얽매여 자기 위안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자부했던 것들 역시 호수를 바다라고 믿고 있던 나의 어리석음이었음을 인정하고 나니 <마에무끼(前向き), 사고방식이 긍정적이며 앞을 향하는 것>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언제부턴가 자부심이라는 명사 앞에 누군가의 특정 모습이나 행위, 지위에 대한 것들을 결합하여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에 자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부심>이 있다고 하거나, 키가 큰 사람은 <키부심>, 끊임 없이 남편 자랑을 늘어 놓는 여자는 <남편부심>, 목소리가 좋은 사람은 <성대부심> 등등 정해진 틀이 없이 적절한 단어를 <-부심>에 끼워 맞춘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나는 한국인이 꽤나 재치가 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성향임에 감탄을 하곤 한다. 나는 사실 수능 점수에 끼워 맞추어 학과를 선택했기에 <학과부심>은 없었고 장학금 한 번 타 보지 못한 평범한 학점으로 <학점부심>도 없었고 또 내 앞으로 걸어오는 남자들을 100M 줄 세우기를 할, 아니 1M도 세울 수 없는 외모이기에 <얼굴부심>도 없었다. 내가 결핍을 느끼고 있는 나의 모든 것들을 감추기 위해, 내가 세상에 드러냈을 때 가장 그럴싸한 것을 골라 내 얼굴을 덮었고 나 자신을 그 뒤로 숨기며 살았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나는 내게 자신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자(自)부심>이 있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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