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부드럽고 쓸쓸한 이야기
서로 의지하는 것도 돌봄이다. 돌봄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보는 일방의 관계로만 생각하는데.
또 돌봄은 돌봄을 준 당사자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돌봄이 또 돌봄을 낳는 것이다. 돌봄은 또 힘이 있거나 여건이 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다. 남을 돌보는 일 자체가 자신을 돌보는 일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서로 돌본다. 일순에 해소할 힘은 없지만 다정하게, 부드럽게. 희미한 빛일지언정 지속적으로.
글에도 귀티가 있다. 최은영 글이 그렇다. 단어에, 문장에 귀티가 들어 있다. 작가의 생각이 귀티 나기 때문일 거다. 이 책에는 감동이 있고, 쓸쓸함이 있고, 격조 있는 이야기가 7편 들어 있다.
1.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은행을 그만두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영문학과 편입생이 된 희원이 지적인 자극을 주는 젊은 강사 ‘그녀’에게 매료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영문과에서 영문 에세이를 가르치는 젊은 강사다.
여자들만이 겪는 소소한 일들로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던 희원에게 그녀는“공부는 대학원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거, 희원씨도 알죠”(37)라며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로 둘은 서먹한 관계가 되고 만다.
용산 재개발 구역의 한 건물에서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나는 편안히 있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녀의 마음에도 상처가 되었는지 그곳을 피해다닌다고 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통근길'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내 눈에 비친 통근길 용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비어버린 건물들을 보고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증을 적었다. 어떤 학생은 명확하진 않지만 도시 개발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느껴진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편향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 입장이 없는 것은 무관심이고 능동적인 순종이라고 했다. 나는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하고 자기검열을 하면서 글을 썼기에 부끄러웠다.
9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그녀처럼 젊은 강사가 되었을 때, 희원은 비로소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해보지만 언젠가부터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이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디로 가는 지 모르지만, 이곳이 허공이 아님을 알려주는 아주 희미한 빛. 그녀는 그런 빛이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33)
"하루가 다 갈때, 무너지지 않으려고, 아니, 무너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쓸 때,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 울어서는 안 된다고 참으며 집으로 걸어갈 때에도, 나는 어딘가에 있을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42~43)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 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 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43)
"어쩌면 그때의 나는 낙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ㄷ람은 누군가가 등불을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44)
2. 몫
도서관 앞에 쌓인 교지를 우연히 집어 들었다가 선배 정윤의 글에 마음을 빼앗긴 스무 살 해진이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1990년대 중반은, 여대 축제에 수백 명의 남학생이 난입해서 난동을 부렸던 사건, 기지촌 여성이 미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던 때, 대학원 여학생이 지도교수의 의해 성추행 당했던 일이 줄줄이 일어났던 때다. 이 소설은 그 때를 배경으로 한다.
희영과 해진은 대학학보사 편집부 동기다. 여기에 선배 정윤이 등장한다. 정윤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들을 쓴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하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쓰는 학생기자였다. 해진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한다.
희영은 여성인권에 관심이 많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사회의 부조리, 모순을 취재하고 분석했다. 희영의 글은 해진 역시 남자들의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희영의 글이나 정윤의 글을 읽을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럴 때 희영의 권유로 글쓰기를 계속한다.
희영은 기지촌 여성의 피살사건을 얘기하면서 정윤과 크게 부딪힌다. 희영에게 그 사람들과 같은 입장일 수 없다는 정윤의 주장에 희영은 글쓰기를 포기하고 기지촌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다. 글쓰기 만으로는 자신이 감당할 몫을 했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서늘한 글을 쓰던 정윤은 결혼 후 학업을 포기하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간다.
결국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해진 하나뿐.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자기만 남았다 생각한다. 글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해진은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었다는 행복, 해진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51)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을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랫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80)
3. 일 년
비정규직 문제 속에서 동갑내기 인턴 다희와 카풀을 하면서 전혀 다른 대화를 하는 지수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 지수는 간척지 풍력발전기 공사현장을 관리하는 3년차 정규직이다. 다희는 인턴으로 대중교통으로는 공사장을 갈 수 없어 나와 카풀을 한다. 다희는 나와 나이가 같지만 다른 일을 하다 입사해서 회사에서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둘은 함께 출근하느라 매일 두 시간 남짓 달리는 차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터놓고 다 이야기 했다고 생각하지만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할 수 있고 듣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계약한 1년 인턴 기간이 끝나고 다희는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둘은 헤어진다. 다희는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데 자기는 그걸 계속 바라만 보면서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이 스노볼 위를 기어다니는 달팽이 같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을 가진 말로, 사람 사이의 인연에도 적용되어, 만날 사람은 때가 되면 만나게 되고, 헤어질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는 의미의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만남도 있고, 흘러가는 듯한 만남도 있는가 하면, 삶의 변곡점이 되는 만남도 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108)
"다희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한다.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119)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 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123)
4. 답신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부모 역할을 해온 언니와 그 언니가 무시당하는 현실과 맞서려는 ‘나’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다. 주인공 ‘나’는 형부를 폭행한 죄로 감방에서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수없이 쓴다.
‘나’는 엄마의 부재로 고모할머니와 아빠의 손에 큰다. 엄마는 어릴 때 자매를 두고 떠났고, 지방으로 일을 하러 다니는 아빠로부터도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자매는 짐이었고, 아버지로부터 언어폭력도 당한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더 신경쓰며 산다.
언니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생활비에 보탠다. 어느날 언니가 학교 교련 선생님인 그 사람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다. 언니는 스물하나가 되던 해에 임신은 한다. 그는 언니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 사람은 언니를 함부로 대한다. 하지만 그를 자신에게 잘해준다며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듬해 조카가 태어난다. 주인공인 나는 조커를 좋아했고, 조카도 나를 좋아한다. 조카를 보기 위해 그 사람이 있는 집에도 더 자주 가기도 한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다른 여학생을 태워주는걸 보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습관처럼 어려운 학생을 카스라이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을 붙잡고 그러면 안된다고 그만두라고 한다. 그건 어쩌면 언니에게 하고 싶던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누군가가 신고했는지, 조사했지만 결과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는 내가 신고했다고 생각했고, 언니는 내가 형부를 모함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과를 하지 않으니까 그가 언니를 때리기 시작한다. 맞고 있는 언니를 보자 이성을 잃은 나는 그의 팔 뼈를 부러뜨러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언니였다. 재판에서 언니는 그 사람에게 맞은 사실도 없다고 했고, 내 폭력적인 성향때문에 저지른 일이라고 하는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체념하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불리한 증언을 부정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듯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주인공은 자신이 그런 경우라고 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언니는 면회를 오지 않았다. 출소하고 8년만에 고모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언니를 만났지만 언니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쳤던 여성이 불과 십여 일을 못 지나서 다시 폭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왜 돌아갈까. 가정폭력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피해자들 의 피해가 장기적일수록 낮은 자아존중감니 낮고, 무기력증이나 부정적 자아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생활전반에 걸쳐 자기효능감이 낮아 상황판단력도 떨어진다고 한다.이야기 속 주인공의 언니도 그런 상태로 짐작한다.
"'처제, 치마 줄였어?'
그 말에 나는 홀린 듯이 교복 치마를 내려다봤어. 그사이 키가 또 자라서 치마가 우릎 선 위로 조금 올라와 있더라.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어. 나는 분노에 떨며 다시 말햇어. 보일러는 틀지 못하게 하는 건 잘못이라고, 언니는 임신 중이라고. 그는 어떤 미동도 없이 텔레비전만 보았지."(141)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 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150)
5.파종
텃밭을 배경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여동생 이야기다 .
작가인 주인공 '나'는 이혼하고 다섯 살짜리 딸 '소리'와 함께 오빠네 집으로 들어간다. 오빠는 어째서 남편과 헤어졌는지,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텃밭 가꾸는 걸 도와달라고 할 뿐.
소리는 칭얼거리거나 조르지 않았다. 소리는 여덟 살 때, 오빠가 밭을 매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호미에 정강이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나는 오빠에게 악을 썼지만 눈빛으로만 그만하라고 할 뿐이었다. 오히려 어린 소리가 눈을 꼭 감고 아픔을 참으며 의젓하게 치료받는 속깊은 아이다.
오빠는 소리가 6학년 때 세상을 떠난다. 오빠가 떠나고 텃밭도 엉망이 됐다. 소리는 삼촌과 함께 살았을때 가꾸던 텃밭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었다.
나는 소리와 텃밭을 다시 가꾸기로 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땅을 갈고, 씨를 뿌렸다. 일을 마치고 마주 앉는데, 소리 정강이에 난 흉터가 보였다. 소리는 그 흉터가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모가 함부로 뱉는 말이 어린 자식에게 얼마나 파괴적으로 다가왔는지 아버지는 알았을까. 폭언으로 물들던 유년의 밤을 그녀는 떠올렸다. 나가 죽으라고. 아버지의 말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서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따라다녔다."(118)
""민주야."
"응."
"너 힘든 거, 나 줘…… 가지고 갈게."
그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
그는 그녀의 마음이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기 손 위에 그녀의 이야기를 올려달라는 듯이. "(203)
6. 이모에게
조카 '나'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작품 속 이모는 22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낳은 딸을 제부가 출근하고 나면 돌본다. 이모는 아예 동생네 집에 입주해 조카를 씻기고, 제부의 밥을 차리고, 동생이 퇴근할 때까지 집안일도 한다. 자신의 물건을 소유할 공간이 없고, 동생 가족과 동거하는 이모의 모습은 마치 식모나 투명 인간처럼 보인다.
어려서 이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조카가 나이 들어 이모를 이해하게 되면서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우나 이모가 아빠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죽도록 일만하면서도 엄마가 시댁에서 죄인처럼 지낸다는 것 등도 알게 된다. 이것은 아빠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과도 연결 된다. 명문대 고학력자이지만 아빠는 일하지 않는 날이 많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다. 무능력자다.
이모나 엄마가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등이 모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면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이 아기를 유산시켰다는 것, 이모가 홀로 살게 된 것도 유산과 관련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된다.
비행장 가까이 살고 있어 비행기가 낮게 나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모는 비행기를 보며 자유로움을 동경한다. 어릴때부터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이모의 훈육 덕분일까,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이어 조종사가 된다.
작품의 결말에서는 이모가 죽어가면서도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여주며, 화자는 이모의 사랑을 기억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이모는 내가 여린 탓에 함부로 대우받고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이모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모는 자기 자신을 대하듯 나를 대했을 것이다. ( 262)
이모 방에는 옷장이 없었다. 행거에 걸린 겉옷 몇 벌, 3단짜리 원목 서랍장에 들어 있는 옷과 속옷, 잠옷 몇 벌이 전부였다. 우리와 같이 살 때 이모의 방에 있던 커다란 장롱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식구들의 옷과 사철 이불이 들어 있었다. 정작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커다란 농짝을 곁에 두고 그 작은 방에서 이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이모는 한 번도 그 장롱에 대해, 자신의 작은 방에 대해, 나를 키우고 살림을 해야하는 처지에 대해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모가 품위를 지키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263)
7.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식모 출신의 육십 대 여성 기남의 시각으로 복잡하면서 어려운 모녀 관계를 긴 호흡으로 풀어간 작품이다. 식모살이를 했던 기남은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남은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나 아홉살때 권사장네집으로 보내져 식모생활을 하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기남은 권사장이 운영하는 공장의 주방에서 일했다. 기남이 정당한 월급을 요구하자 권사장은 기남을 쫒아내듯 내보냈다. 공장에서 일하던 기남은 공장의 거래 업체 직원과 결혼을 한다.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그날의 기억, 냄새, 그 순간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스무살이 된 기남은 언니라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친모의 생신잔치에 갔다. 기가 막힌 건 그가 부잣집 딸로 태어났으나 딸이어서 버려진 아이였다. 잔치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느낀다. 기남은 끝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남편은 다섯 살 된 전 부인의 아이 진경을 데리고 왔다. 진경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남에게 사랑을 준다. 기남은 진경을 통해 세상에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가 내 엄마여서 좋아."라며 진심으로 기남을 좋아하는 진경이. 겨울 어느날, 외출하려는 기남에게 진경이 품에서 기남의 신발을 꺼내준다. "발 시리지 마, 엄마."라고 말하면서.
우경이는 진경이가 여덟 살 때 태어났다. 조용한 진경과 달리 우경은 적극적이었다. 우경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재미교포와 결혼한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경이 기남에게 바라는 건 자기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경에게 기남은 얼룩 같은 존재였다. 기남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우경이 오래전 자신을 떠나간 것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가 부끄럽다. 그런 기남에게 '부끄러워해도 된다'는 우경의 어린 아들의 말이 큰 위로로 다가온다.
한편 진경은 왜 알콜중독자가 되었을까?
기남은 친딸이지만 타인같은 우경의 가족에게 거리감과 불편함, 어려움을 느낀다. 진경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진경이 술로 문제를 일으킬때 가소롭게 쳐다보는 우경의 식구들 앞에서 기남은 진경을 감싸지도 붙잡지도 못한채 떠나보냈다.
딸이 자신에게는 누구보다도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을 기남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
홍콩에 초대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는데 더 많은 걸 바란 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다. (295)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중식당의 냄새, 식기의 모양. 음식의 종류, 노인 옆에 있던 젊은 남자,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 입었던 옷과 큰언니라는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307)
기남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엄마가 도울 일 없니…… 그 질문에 우경은 답한 적이 없었다. 기남은 우경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남은 우경이 자신에게 원하는 건 그저 우경을 가만히 두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경의 인생에 감히 개입하지 않는 것, 우경이 자신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라고. 어째서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일이 제임스의 어머니에게는 가능했을까. 우경은 자신에게서 어떤 결정적 결점을 발견했던 걸까. 자신의 존재 자체에 묻은 얼룩 같은 것····. 그것을 기남은 알 수 없었다. (317)
(우경의 아들)마이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 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앗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멀고 낯선 혈육이 되리란 것도. (---) 그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320)
8. 해설, 더 가고 싶어
돌봄 3부작으로도 읽히는 <파종>,<이모에게>,<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홀로 남겨진 누군가를 보살피고 그 돌봄을 받는 이들이 종국에는 서로 기대로 의지함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햇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을 담아낸 잭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40)
나는 여러모로 결핍이 큰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삶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벌처럼 느낀 적이 많았다. 그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포장할 때조차 그랬다. 그런 내가 나의 결핍에 감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데까지 쉽게 점프하여 갈 수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해 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348)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쓰면 그것은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고 했다. 이 책은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쓴 여성의 이야기'여서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고, 보편성을 획득한 소설이다. 보편성을 획득하면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최은영은 여자가 여자를 돌보는 이야기를 참 많이 쓴다. 최은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 안에서 뱅뱅거리지 않는다. 깃발이나 마이크를 들지 않지만 한계 너머로 나아간다. 여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게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