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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Oct 11. 2022

인스타그램에 없는 삶, 스토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문학을 사랑했고 가르치는 일을 기꺼워했으며 일생을 그 길 위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 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인간적 성공을 일부러 피하며 살다 간듯한 일생,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어쩌면 무기력한 시간을 살다 간 남자’, 또는 '또 다른 우리네 처럼 살다 간 남자' 라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는 전래동화의 구조를 닮아 있다. 시간이 흐르는대로, 이야기는 주인공을 따라서 주인공에게 집중하여 전개되며, 대사는 적고 되도록 들려주듯 서사로 서술하며, 갈등구조도 몹시 단순하다. 하나의 사건이 생기고 사건을 해결해야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점이 그렇다. 다 읽고 난 후 다른 이에게 들려주기도 용이한 구조도 전래동화를 닮았다. 

농부의 아들인 스토너는 농업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입학한다. 입학한 목적과 달리 스토너는 농사보다는 문학을 좋아하며 가르치는 일에 재능이 있고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가면서 선택에 도움이 될만한 의견을 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복이다.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그런 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31~32)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할 때, 또는 알아채지 못할 때, 도장 찍듯 결정하게 하는 순간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영문학과 사랑에 빠졌다고 확신을 시켜주는 사람. 슬론 교수의 한 마디가 스토너에게 결정적 순간이 된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와 무관한 일이 세상에 벌어지고 크든 작든 영향을 받는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양차 세계대전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가까운 친구들마저 하나둘 전장으로 떠나는 걸 보면서 스토너도 갈등한다. 입대를 하는 것도 입대를 하지 않는 것도. 어떤 결정이 스토너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스토너의 지도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야. (---) 학자에게 평생 구축하고자 했던 것을 파괴해서는 안 되네.” (---) “인류가 겪은 전쟁과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53~54)


스토너는 입대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젊은이라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전쟁이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점을 누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 더 힘든 일일 수도 있었다. 스토너의 결정을 굶주린 사람 같다고 주변에서 비아냥 거렸다. 양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것에 대해 어떤 평론가는 엄혹한 시간을 견디어내는 법으로 스토너가 사는 법을 선택한 게 아닌가 라는 말도 한다. 


스토너는 성실했으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기다렸고,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곤란을 당하는 쪽이었고 어리석을 만큼 융통성도 없어 보인다. 진정한 사랑 앞에서도, 사회적 지위나 명성 앞에서도 사람들의 정치적인 행태에 그대로 당하면서도 끝내 이겨보지 못하는, 그것이 스토너가 사는 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딸 그레이스의 불행이 뻔한데도 그것을 막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당하듯 바라만 보는 듯한 태도는 얼른 수긍하기 어려웠다. 스토너 자신도 방황하는 딸을 누구보다 안쓰러워 했다. 


그레이스를 향한 스토너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아내 이디스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이디스는 어린시절에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고 감정을 절제하는 교육을 받고, 폐쇄적인 성적 가치관을 강요당하며 자랐다. 이런 교육은 이디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의 모든 행동을 구속한다. 어린 시절 감정을 주고받는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크고 난 후에도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모르게 한다. 이는 스토너를 고독하게 만들었고그레이스에게는 일그러진 사랑으로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감정을 교류하고 소통하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이디스의 지나친 간섭으로 아버지와 정서적 교류마저 금지 당한다. 그레이스 방황이 시작되고 급기야는 또래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그레이스의 방황은 10대 아이의 그저그런 반항이 아니었다. 자신의 보호할 수 있는 수단으로 나쁜 최선의 선택이었다. 자신의 미래까지 훼손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선택이었다. 


결혼이라는 방식으로 "그레이스가 컬럼비아를 떠난 것이 사실은 감옥을 벗어나려는 시도"(347)였다. “난 일부러 임신을 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351) 딸의 방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지켜만 보던 스토너를 조금은 이해하게 한다. 


스토너의 여자들, 아내 이디스와 캐서린, 이디스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가 신경증을 앓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스토너를 괴롭히는 인물로 그려졌으나 그 자신도 어떤 이유로든 괴로운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안쓰럽다. 동료적 사랑을 나눈 캐서린, 스토너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다. 책 바깥의 삶이라면 스토너와 성숙한 사랑을 나누는 이 둘의 관계가 더 잘 되어서 나머지 인생이라도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인물이다. 정서적, 학문적으로도 소통이 가능한 관계라니! 얼마나 이상적인가. 


소설 결미에서 죽음을 앞둔 스토너의 고백은 지나온 날을 돌아보게 하는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스토너의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그가 기대한 것은 '농부의 아들로 났으나 세계적인 석학이 되고 대학에서는 명예로운 보직을 얻었으며, 그에 따른 물질적 보상도 충분해서 대궐 같은 집에 아름답고 상냥한 아내와 사랑스런 아이들과 살면서 지성인답게 우아하고 품위 있게 주변 사람들을 대하면서---.' 책을 읽는내내 스토너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강호의 도가 떨어진' 21세기한 국사회에 익숙해서인지, 나는 스토너가 무리를 해서라도 부조리한 것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나가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러지 않았다. 


이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없어 보이는 문장들로 쓰였다. “그는 수업 준비를 하거나 과제를 채점하거나 논문을 읽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연구를 하고 글을 썼다. 세월이 흐르면 자신도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우정과 사랑과 소박한 바람이었다. 스토너의 일상에서 끝없이 반복된 일이었고, 우리네 삶에서 바람이라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루하루, 현재와 현재가 집적된 것이 일생이다.


다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뀐다. 한 사람의 삶을 성공과 실패로 양단할 수는 없다.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로 삶을 구분하려 드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다. 삶을 성공과 실패로 평가하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있고 약간의 보람도 느끼며 살았다면 그것도 괜찮은 삶이다. 나는 나의 인생에 무엇을 기대해 왔으며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 기준을 내가 정하고, 현재에 집중하며, 현재가 충만하도록 살 필요가 있다. 


눈물이 났다. 슬픈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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