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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Sep 09. 2022

인생의 베일

화요심야독서



이토록 사랑에 서툴러서야 


1920년대 영국 식민 통치 하의 홍콩. 키티는 사랑에는 서툴지만 진실한 남자 월터의 아내다. 그녀가 매력적이지만 바람둥이인 찰스와 사랑에 빠진다. 월터는 키티에게 찰스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며 홍콩을 떠나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중국의 오지 마을 메이탄푸로 함께 갈 것을 강요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었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 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월터)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자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월터)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눠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말하는 월터는 선한 사람인가, 무서운 사람인가. 


"난 그렇게 자랐어요. 교향곡 연주회가 지루하다는 사람에게 음악에 대한 기 호가 없다고 힐책하는 것과 같아요. 난 그냥 예쁘고 명랑해요. 장터 노점에 서 진주 목걸이나 담비 외투를 찾지 마요. 주석 트럼펫이나 장난감 풍선이나 찾으라고요." (키티)


이런! 사랑의 잔혹성이라니. 자신과 맞지 않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 평생을 노심초사할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 '나는 원래 그런 사람,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솔직해서 더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여자.  그것이 사랑인지.  


월터를 흔든 결정적인 사건은 키티의 임신이었다. 내심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아이예요.'라는 말을 아내의 말을 기다렸던 같다. 그러나 키티는 끝내 말하지 못한다. 남편은 어떨 때  무너지기 쉬운가. 아내가 가진 아이가 남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인가? 


월터는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월터가 실험 중에 콜레라에 감염되었을 것이라는 소식은 월터의 죽음이 우연이 아닌 자살이 아닐까 추정하게 한다. 절망에서 벗어 나오지 못해서 한 행동이 아닐까.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한편 찰스와의 불륜이 그 모든 불행의 시작이며 끝이 되었는데도 키티가 찰스를 다시 만나서 다시 한번 육체적 욕망에 빠지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월터가 죽은 뒤 키티는 남편과의 애증의 관계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고 홍콩에서의 삶을 정리한다.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키티는 옛사랑인 찰스와 만나 찰스의 욕망 앞에 욕정을 느끼며 그의 품에서 육체의 희열을 느낀다. 키티는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자기 안의 알 수 없는 충동에 혼란스러워한다. 육체가 머리에 도발하는 상황이다. 


인간애와 지성을 갖춘 건실한 남편, 월터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키티는 속되고 천박했던 자신의 과거와 부족하다면 부족한 대로 그 자체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며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월터가 남긴 말은  “죽은 건 개였다.” 라는는 수수께끼 같은 말뿐이다. 이제 영원히 돌려받을 수도 없는 시간 속으로 떠나면서 용서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월터의 심리상태는 무엇이었나? 


월터는 인간적 자비와 합리적인 이성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화해하기를 거부하므로 자멸하고 마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한편 키티도 예외는 아니어서 코로나가 창궐하는 중국 오지에서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수녀를 보고 감화되어 자신도 봉사하기도 했지만,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홍콩에서 옛 연인 찰스와 다시 한번 육체관계를 맺으며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장면은 독자까지 절망하게 만든다.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나약하고 어리석은 건가.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소설 도입부에 인용된 셸리의 시처럼, 작가 서머싯 몸은 온갖 오색 베일을 에두르고 있는 이들 인간에게서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충동, 어리석음, 이중성, 불완전함과 같은 진짜 본모습을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키티를 응원할 수밖에 

 

키티가 찰스에게 버림받고 월터도 예전처럼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게 되었을 때 키티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허무감에 빠진다. 그 와중에  원장 수녀와의 만남은 찰스를 잊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언뜻 원장 수녀를 만나서 단숨에 인생이 거룩하게 변모한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야 설득력이 있다. 키티가 찰스와 다시 한번 뜨겁게 몸을 섞는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그래도 메이탄 푸에서 키티가 얻은 미덕은 이런 일상 속 사소한 행복의 발견이다. 그 일상의 경험이 허영덩어리였던 키티를 조금 낮은 곳에서 행복을 발견하도록 내려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은 젊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영원할 줄로 알았던 시절을 건넌다. 젊음이 주는 자만에 도취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잘못된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키티가 보여주는 젊은 허영과 자만이 그걸 보여주는 것이며, 폭풍 같은 그 시간을 건너서, 혹은 고통을 딛고 좀 나아진 인생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보통 사람의 삶이다. 그러니 키티의 미래를 응원할 수밖에. 세상에 수많은 키티를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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