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위로
밑줄 긋다
저자의 1년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집 주변을 거닐며 마주했던 자연의 숨결을 기록한. 햇살과 새들의 노랫소리가 자신을 불러내던 찬란한 날도 있었지만,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버거운 숙제처럼 느껴지던 날들에 대한기록이다.
글쓴이가 기록한 풍경들은 특별히 진귀한 건 아니다. 검은 독수리를 눈앞에서 보거나 스코틀랜드 살쾡이를 길들였다는 모험은 나오지 않는다. 힘겹게 언덕을 올라 찾아낸 작은 난초 한 송이를 빼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생명은 영국 도심의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그저 가을날 보석처럼 반짝이던 낙엽 더미 위에 서 있을 때, 갓 돋아난 버들강아지를 발견했을 때, 들판 위를 스쳐가던 새매를 보며 느꼈던 깊은 위안에 대해 썼다. 교회에서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자연 속에서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관찰한 월별기록, 10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9월까지 1년간의 기록이다.
10월 낙엽이 땅을 덮고, 개똥지빠귀가 철을 따라 이동하다.
11월 햇빛이 희미해지고, 모든 색채가 흐릿해지다.
12월 한 해의 가장 짧은 날들, 찌르레기가 모여들다.
1월 무당벌레가 잠들고, 눈 속에서 피어나는 스노드롭 꽃망울이 올라오다.
2월 자엽꽃자두가 꽃을 피우고, 첫 번째 꿀벌이 날아들다.
3월 산사나무에 새잎이 돋고, 가시자두꽃이 피다.
4월 숲바람꽃이 만개하고, 제비가 돌아오다.
5월 나이팅게일이 노래하고, 사양채꽃이 피다.
6월 뱀눈나비가 춤추듯 날아다니고, 꿀벌난초가 활짝 피어나다.
7월 야생당근이 하얀 꽃을 피우고, 점박이나방이 팔랑거리다.
8월 사양채 잎이 돋아나고, 야생자두가 익어가다.
9월 블랙베리가 무르익고, 제비가 남쪽으로 떠날 채비를 하다.
책 읽기의 고정관념을 깨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당연히 어떤 사상이나 지식,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이야기 속에서 저자의 메시지나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 여겼다. 이른바 독서교육이 목표로 하는 바도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방식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저 저자와 함께 산책하듯 읽으면 된다. 저자와 나란히 걸으며 바람 소리와 새 소리를 듣고, 물과 흙, 비의 냄새를 맡으면 되는 것이다.
"이게 뭐야!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책에서 기대했던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책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책 읽기를 무겁게 만들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면 허탈했던 마음도 그 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독서의 목적에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도 있지만, 그 자체로 즐거움이나 위안을 얻는 일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즐거움이나 위안조차도 무언가를 ‘얻었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 김대현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건강해지려고 운동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자연은 도구가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것이다. 숙제처럼 자연을 도구 삼아 억지로 즐기려 하면 짧은 산책마저도 버거울 수 있다. 그의 조언 속 '운동'과 '산책'이라는 단어를 '독서'로 바꿔 읽어보았다. "모든 독서를 지식이나 위안,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지 말라. 그저 독서하라."
무작정 걸으라고 말하다
누군가 깊은 우울에 빠져 힘들어할 때, 나는 혼자 집 안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걸으라고 조언했다. 사람이 북적이는 도심을 걸으라고.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다. 걷는 것이 옳았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도심보다는 자연을, 북적이는 사람들보다는 야생에서 홀로 산책하라고 말을 바꾸어야겠다.
그동안 나는 걷기 힘든 상황이라면 몸이라도 움직이라고 했다. 한밤중이거나 날씨가 궂을 때, 아이나 누군가를 돌봐야 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는 서랍을 정리하거나 베란다를 청소하라고 했다. 무엇을 하든 눕지는 말라고, 회복력을 모두 소진해버리지 말라고 덧붙이곤 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우울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각자 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글을 쓰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둠을 다스린다. '걷기'도 그중 하나다. 다행히도 나는 집 가까이에 드넓은 자연이 있었고, 그곳에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만약 자연을 찾아 나서기 위해 특별한 준비가 필요했다면, 그마저도 곤란했을 것이다.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연에서 걸으라는 말은 때로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되도록 밖으로 나가 걷되, 가능하다면 자연에서 걸으라"고 고쳐 말해야겠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된 지 90일이 되어가던 때, 집 가까이에 한강과 공원이 있어 그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하던 산책이었지만 그때는 달랐다. 하루 두 시간 넘게 걷는 날이 많아졌고, 해가 길어지고 햇볕이 좋아지는 것도 큰 위안이 되었다. 걷다 보니 의식하지 않은 루틴도 생겼다. 오전에는 해가 뜨는 방향으로, 오후에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해를 따라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보이는 것이 많아졌다
코로나 시기에 도시에 이렇게 많은 새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종류도 다양했다. 막연히 참새가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가 참새, 까치, 까마귀, 비둘기 정도만 구별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알면 보이는 법이니까.
참새뿐만이 아니었다. 목련이 한창 피었을 때, 나무 아래를 걷는데 꽃잎이 자꾸 떨어지는 것이었다. 바람 때문도, 꽃이 지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떨어뜨리는 것 같아 올려다보니 직박구리였다. 꽃잎을 쪼아 먹다 흘리는 중이었다. 참새보다는 크고 까치보다는 작은 새. 정수리에 어린아이 머리처럼 털이 삐죽삐죽 나 있었는데, 털갈이 중인지 늘 그런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새가 올해 처음 목련꽃을 쪼아 먹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을 테지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일 것이다.
초봄에는 한강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새떼가 날아와 한동안 머물다 점심 무렵이면 날아가곤 했다. 새를 구별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새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내려앉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시멘트를 걷어낸 호안에 버들과 부들을 심어 풀이 우거진 곳에는 개개비 같은 작은 새들이 살고, 큰 새들은 무리 짓기보다 홀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새가 바로 왜가리다. 물속을 걸을 때 물의 저항 때문에 보폭을 크게 하여 천천히 걷는 사람처럼, 아니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처럼 왜가리는 걷는다. 걷다가 멈춰 서서는 박제된 듯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오리를 보며 녀석이 얼마나 오래 견디는지 속으로 숫자를 세다 포기한 적도 있다. 녀석이 물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놓쳐버리기도 했다. 일분,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물속에서 이동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더니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자맥질하곤 했다.
한강 샛강에는 백로가 산다. 모내기를 마친 푸른 논에 하얗게 서 있는 새들이 바로 백로다. 논에 사는 우렁이나 미꾸라지가 그들의 먹이일 텐데, 농약 때문에 수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 백로가 물이 깊지 않은 샛강에도 찾아와 살고 있다. 샛강을 따라 걷다 보면 푸드덕 날아가는 꿩도 만날 수 있다.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 모른다. 수풀과 흡사한 몸 색깔 때문에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보든 보지 않든 늘 내 주위에 있었고, 『야생의 위로』 저자가 보았던 것들이다. 이제 해 질 녘 산책길에 만나는 하루살이 떼마저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으며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