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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Mar 31. 2019

 아이들에겐 꿈의 길잡이가 필요해요

그림책에 물들다 | 미스 럼피우스





미스 럼피우스 | 바버러 쿠니 그림·글 | 시공주니어


울프와 동시대를 살았던 앨리스

 


"여자는 자기만의 재산과, 방해받지 않고 창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자기만의 방>에서 한 유명한 말입니다. 이 책이 출판 되었던 해는 1929년입니다. 당시는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대학원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 했던 시대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버지니아 울프가 <미스 럼피우스>의 주인공 미스 럼피우스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또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자기만의 방>에서 언급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서 미스 럼피우스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들던 시대였어요. 여자란 곱게 자라서 훌륭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을 소망으로 품고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미스 럼피우스는 평범한 여성들과는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직업을 갖고,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세상 구경을 하러 나갑니다. 할아버지와 약속했던 세 가지를 하나씩 실천해 나가기 위해서였지요. 미스 럼피우스가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책에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얼핏 크게 고생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를 앞서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압니다. 여성이기에 더 어려웠을 것을, 책에서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앨리스가 겪었을 수많은 역경을요.


그래서인지『미스 럼피우스』는 엄마들이 더 좋아하는 책입니다. 남성의 영역이기 쉬운 탐험을 독립적으로 실행한 아름다운 여성의 삶을 다룬 책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들은 딸들이 이 책의 주인공처럼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지요. 꿈을 갖고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책을 통해서 들려주고 싶은 거지요.


미스 럼피우스가 꾼 꿈의 시작은 할아버지 무릎이었습니다. 



두 명의 여성이 꾸는 꿈  


  『미스 럼피우스』는 두 명의 앨리스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성장한 후에는 ‘미스 럼피우스’로 불리다가 지금은 ‘루핀 부인’으로 불리는 고모할머니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고모할머니의 일생을 들려주는 어린 앨리스입니다. 


  앨리스의 조상은 먼 옛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와 바닷가에 정착했습니다. 고모할머니 앨리스는 저녁마다 할아버지로부터 먼 세상 이야기를 듣고 자랍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먼 세상 이야기는 어린 소녀의 가슴 한편에 자연스럽게 뿌려진 꿈의 씨앗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방 안에 걸려있는 그림은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먼 세상이 어떤 곳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야자수 나무와 원두막 같은 집이 있는 그림, 넓은 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헤치며 나아가는 범선을 그린 그림이 그것입니다. 미스 럼피우스는 이 그림 속의 장소들을 여행합니다. 이 그림은 먼 후일 바닷가로 돌아온 미스 럼피우스의 집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물려받은 그림은 할아버지가 꾸었을 꿈이고 고모할머니가 꾼 꿈이며 다시 어린 앨리스가 물려받을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지요. 


  고모할머니 앨리스는 고향을 떠나 먼 도시에서 도서관 사서가 되었고, 사서로 일하면서 먼 세상에 관한 책을 꾸준히 읽고 틈틈이 여러 곳을 방문을 하는 등 차근차근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실행합니다. 할아버지 방에서 보았던 그림 속 열대의 섬에서는 그곳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도 오르고, 정글을 지나고 사막도 횡단합니다. 할머니가 되었을 때 마침내 바닷가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옵니다. 날마다 물결 위로 떠오르는 해와 장엄하게 지는 해를 보며 바위틈에 조그만 정원을 가꾸며 사는 일은 행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꾼 꿈을 모두 이루게 되었지요.  


  하지만 고모할머니 앨리스에게는 남은 꿈이 하나 더 있었지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봄이 오고 산책을 나갔던 고모할머니 앨리스는 여기저기 아름답게 핀 루핀 꽃무리를 보게 됩니다.  아름다운 광경에 근사한 생각을 떠올립니다. 루핀 꽃씨를 마을 곳곳에 뿌리는 거지요. 곧 씨앗을 주문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마을 이곳저곳에 뿌립니다. 사람들은 ‘정신 나간 늙은이’라고 수군거렸지만 고모할머니 앨리스는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합니다. 꽃이 피어나면 모든 것이 곧 해명될 테니까요.


이듬해 온 마을은 루핀 꽃으로 가득했고, 해마다 루핀 꽃은 점점 더 많이 피었습니다. 이제 고모할머니는 루핀 부인이라는 불립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도 마침내 해낸 것입니다.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요.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란 꽃을 심고 가꾸는 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면 마당을 쓰는 일처럼 사소한 일조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고운 마음으로 고운 걸 볼 수 있고, 고운 걸 아끼는 마음으로 사는 것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루핀 부인의 방에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제각기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루핀 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고모할머니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때 그랬던 것처럼요. 루핀 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 속에는 어린 앨리스도 있습니다. 루핀 부인은 어린 앨리스에게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할 것을 주문합니다.     


아이들 꿈의 길잡이

  

 아이들에게는 꿈의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할아버지가 고모할머니 앨리스의 꿈의 길잡이였고, 고모할머니가 다시 앨리스의 꿈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처럼요. 


 “저녁이면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아서 머나먼 세상 이야기를 들었어요. 앨리스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오트밀 죽을 먹었지요. 그리고 학교 갔다 오면 숙제를 했고요. 앨리스는 금방금방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오트밀을 먹고 학교에 다녀와서 숙제를 하고, 저녁에는 할아버지에게 먼 세상 이야기를 듣는 앨리스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아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앨리스의 평범한 일상의 밭에 꿈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가도록 합니다. 할아버지와 앨리스에게 꿈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일은 몹시 소소한 일상이었지요. 우리 아이들이 대부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일괄적으로 검사지를 통해 적성을 찾는 진단을 받고, 그들 중 일부는 좀 더 꿈을 잘 이루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가 비용을 지불하고 미래를 컨설팅받게 하는 우리네와는 달랐습니다.  


 이 책은 꿈을 이룬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가꾸고, 할아버지 무릎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꾸었던 것처럼 꿈꾸기조차 일상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꿈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며 살아가는 동안  다시 떠올리고, 또 일상을 살고, 그러는 가운데 꿈은 이루어지지요. 하루아침에 적성을 발견하고 깨닫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꿈도 흔하지 않습니다. 


 '진로교육'이라는 말이 퍽 익숙해졌어요. 어쩐지 진로교육은 일상에서 이뤄지는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꿈조차 아이가 공부만 잘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믿어온 것 같구요. 엄마가 아이의 꿈을 대신 꾸고, 그것들이 먼 데, 특별한 데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매는 거지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 당연히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일인 줄로만 알았던 것처럼요. 


아이의 진로를 위한 효과적이고 특별한 교육이 따로 있을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에밀리 젠킨스 글, 소피 블래콜 그림<산딸기 크림 봉봉>(씨드북)

김장성 <민들레는 민들레> 이야기꽃

이와무라 가즈오 <아직도 생각하는 가구리>(진선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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