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스트] 카탈로그 레조네
아트테크를 하기위해 꼭 필요한 지식
미술계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카탈로그 레조네 catalogue raisonne라는 표현을 흔히 볼 수 있다. 전시회나 경매 도록 등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우리말로 '전작 도록' 혹은 발음나는 그대로 부르는 '카탈로그 레조네'는 대체 무엇일까? 한국어로 번역하기 애매한 '레조네'는 '검토하다, 고찬하다'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raisonner에서 온 것으로 카탈로그 레조네는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후 국제적인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단어 의미로 풀어 보면, '검토한 작품을 모은 도록'이다. 일반적으로 전시회 도록이 한정된 기간 동안의 작품 혹은 전시 주제에 맞는 작품을 선벽적으로 소개한다면, 카탈로그 레조네는 회고적인 성격이 강해 작품을 누락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카탈로그 레조네의 수록 여부가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작품 몇십 점, 작가 생활 고작 몇 년으로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드는 작가는 없다. 작품이 질적, 양적으로 갖추어진 중격 작가 이상만 만들 수 있기에 카탈로그 레조네는 모든 작가의 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탈로그 레조네를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검증된 작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카탈로그 레조네에 실린 작품은 미술사적인 의미는 물론 미술 시장에서의 보증 수표가 되기 때문에 컬렉터도 관심을 갖고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카탈로그 레조네는 미학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 양 측면을 동시에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작품 선별은 보통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며, 작품 숫자가 많기 때문에 재료(장르) 혹은 주제별로 나누어서 구성하는데, 아주 드물게는 작품 크기별로 구성하기도 한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훗날 작품의 진위 여부 판단이나 작품의 발전 양상 견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법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게 작업해야 한다. 나중에라도 잘못된 점을 발견하면 즉각 수정과 보완을 해야 한다. 제목, 크기, 연도, 재료 등 작품 정보뿐 아니라 작품의 전시 이력, 이전 및 소장자, 제작 배경, 작품이 소개된 도서나 카탈로그의 목록, 사인 혹은 인장의 유무, 손상 및 보수 기록, 분실 또는 위작 여부 등 역사적 기록이 추가되기도 한다. 가령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in의 카탈로그 레조네는 1921년에 제작될 때에는 총 711점을 수록했지만 1966년에는 562점, 1968년에는 420점으로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작품을 걸러냈다. 후대 연구자가 선대에서 걸러 낸 작품을 다시 검토해 카탈로그 레조네에 포함시킬 경우 반대로 작품의 숫자가 늘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들 때는 작가의 기록과 기억을 근거로 하되, 당대 함께 작업한 조수, 미술관의 큐레이터, 미술사가 등 다양한 관계자의 증언과 인터뷰, 기록 등 객관적 자료를 참고해야 한다. 작가의 기억이 잘못될 수 있고 작가가 위증할 수도 있다. 놀라운 것은, 많은 경우 작가의 가족 혹은 재단 관계자가 위작이나 거짓된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탈로그 레조네 편집자는 그 작가의 전문가여야 하며, 때로는 작가 못지않은 권위나 유명세를 얻는다. 앤디 워홀의 판화 카탈로그 레조네 <앤디 워홀 판화Andy Warhol Prints>의 편집자 프레이다 펠드먼Frayda Feldman, 외르크 셰만Jörg Schellmann이 대표적인 예다. 보통 판화 작품은 작품 설명이 길다. 작품 제목, 크기, 재료, 연도 이외에도 에디션 숫자를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디션 숫자는 일련번호/총 제작 숫자로, 1/250 이런식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앤디 워홀의 경우 이러한 설명 옆에 F.& S.II.123같은 기호가 나열되기도 한다. F.& S.는 앤디 워홀 판화 도록을 만든 펠드먼과 셸만을 가리키며, 이들이 만든 카탈로그 레조네의 볼륨II, 123번에 수록된 작품이라는 뜻이다. 한편 미술 전문 출판사 파이든이 최근 펴낸 앤디 워홀의 카탈로그 레조네는 1948년부터 1987년에 제작된 회화, 조각, 드로잉 등 총 1만5천여 점을 망라했다. 편집자 조지 프라이, 닐 프린츠, 샐리 킹 니로는 앤디 워홀 전공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로 앤디 워홀 재단의 관계자를 비롯해 작품 진위 판단 위원회, 당대 워홀 팩토리에서 근무한 조수와 동료, 앤디 워홀 생전에 처음 만들어진 1977년의 카탈로그 레조네 등을 참고해 모두 4권, 2천6백 쪽짜리 카탈로그 레조네를 집대성 했다.
디지털 카탈로그 레조네
최근에는 온라인 카탈로그 레조네를 편찬하는 추세다. 인쇄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접근성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너무 많아 인쇄비만 한 권당 1백만 원 정도가 필요한 얀 브뤼헐 Jan Brueghel의 경우 온라인 카탈로그 레조네 http://www.janbrueghel.net를 잘 구축해 비용을 절감했다. 한차례 위작 시비를 거친 후 진품은 34점 밖에 없는 걸로 판명한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도 온라인 카탈로그 레조네 http://www.essentialvermeer.com를 제공한다.
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방식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위 작자가 카탈로그 레조네를 참고해 감쪽 같은 가짜를 만들어 낼 경우 작품의 진위 판단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카소의 경우 온라인 카탈로그 레조네 http://picasso.shsu.edu/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관련 전문가로 접속을 제한한다.
참고: <갤러리스트> 김영애 지음 마로니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