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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ul 04. 2022

한 사람을 위해 쓰면 에세이 쓰기가 수월해진다



에세이는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인 동시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글이다. 나의 이야기가 담긴 글이지만 나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읽을 글이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수를 위해 쓰지 말고 내가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에세이의 아버지 몽테뉴(Montaigne)에게는 그보다 세 살 많았던 친구 라 보에시 (La Boétie)가 있었다. 그 둘은 만나자마자 영혼의 단짝을 만난 것처럼 가까워졌는데, 비극적으로 라 보에시는 몽테뉴를 알게 된 지 사 년 만에 3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친구를 잃은 몽테뉴는 큰 실의에 빠졌는데, 특히 친구와 나눴던 깊이 있는 대화의 상실감을 크게 느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50년 넘게 강의를 했던 르네상스 학자 도널드 프레임(Donald M. Frame)은 이렇게 말했다. 대화할 상대를 잃은 몽테뉴는 새로운 소통의 창구로 에세이 쓰기를 택했고, 라 보에시의 빈자리는 독자가 대신했다고. [1]


내 에세이의 독자를 한 사람으로 좁히면 에세이 쓰는 것이 쉬워진다. 그 한 사람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면 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여러 사람을 이해시키려는 것보다는 글의 길을 잡는 것이 수월해진다. 그리고 한 사람을 감동시킨 글은 타인도 감동시킬 수 있다. 단, 작가와 그 단 한 사람만큼의 관계가 없는 독자도 작가가 에세이에서 보여주는 삶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전후 사정을 설명만 해준다면 말이다. 좁은 것이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사람 마음에 깊게 들어가는 글은 감동을 준다.


나는 에세이의 한 좋은 예가 죽음을 앞둔 부모가 자식에게 남기는 인생의 지혜가 담긴 편지인 것 같다. 나의 삶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나는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았다는 걸 알려주는 진솔한 글.


물론 부모의 편지를 읽는 자식은 부모의 깨달음과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부모님 시대의 상황이었고 부모님의 깨달음은 현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가 작가의 결론이나 교훈에 동의를 해야만 좋은 에세이인 건 아니다. 비록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작가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에세이일 수 있다. 작가가 에세이를 통해 들려준 진솔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그 사람은 충분히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고 작가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말이다. 거기에 독자를 향한 작가의 애정 어린 마음까지 전해 진다면, 자식은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겪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사랑 같은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에세이가 아닐까.



[1] Michel de Montaigne (Translated by Donald M. Frame), The Complete Essays of Montaign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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