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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ul 02. 2022

에세이스트라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그 노트

비망록, 혹은 Commonplace Book

비망록이라는 것이 있다. 어감조차 어려운 이 단어의 뜻은 "잊지 않으려고 중요한 골자를 적어 둔 것. 또는 그런 책자"이다. 비망록은 영어로 commonplace book이라고 하는데, 아주 흔한 (commonplace) 것들을 적어 놓은 책 (book)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에세이스트에게는 이 책이 한 권씩 있어야 한다.


Commonplace book에는 책(book)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사실은 노트다. 아니, 처음 시작은 노트다. 그 안의 내용이 쌓이고 익어가며 성숙해지면 책으로 탄생할 수도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정말이지 무서운 속도로 책을 쓴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자그마치 752페이지의 백과사전까지 썼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베르베르는 열세 살 때부터 혼자만의 비밀 노트를 기록해 왔다. 수십 년을 써온 그 노트 속에는 스스로 떠올린 영감, 상상력을 촉발하는 이야기, 발상과 관점을 뒤집는 사건, 흥미로운 수수께끼와 미스터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해석 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책 소개 중


기록해야 한다. 아주 흔한 것일지라도 내 경험, 생각, 그리고 느낌들을 계속 기록해가는 것.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비망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진다. 흔한 것들을 적어가지만 이 흔한 것들이 나를 흔치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비망록을 쓰는 방법을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꼭 종이 노트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시대에 컴퓨터나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을 순 없다. 나도 웬만하면 펜과 노트를 항상 들고 다니지만 어쩔 수 없을 땐 핸드폰에 생각을 기록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도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비망록만큼은 꼭 종이 노트에 쓰라고 강조하고 싶다. 나는 이 주장을 굽히지 않을 거다. 비망록을 종이 노트에 쓰는 것과 컴퓨터에 쓰는 것의 차이는 마치 사이버 러버와 실제 여자 친구의 차이와도 같다.


물론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이용해 기록하면 편리하다. 엄청난 양의 기록도 단 하나의 기기면 충분하고 검색 기능도 있다.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이랑 노트북만 있으면 되고, 자동으로 클라우드에 백업도 되니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노트는 불편하다. 노트는 잃어버릴 수도, 집에 불이 나면 타서 없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백업이 안되기 때문이 그 한 권의 노트를 잃어버리면 끝이다. 자신이 완성한 문학 작품이 불에 타서 없어진 안타까운 예는 문학사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노트는 무겁다. 항상 들고 다니기도 번거롭고, 항상 펜도 함께 가지고 다녀야 하고, 기록이 쌓이다 보면 그 무거운 노트도 계속 쌓인다.


그렇다. 노트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래도 꼭 종이 노트에 쓰라고 강조하고 싶다. 다른 글은 몰라도 비망록만큼은 종이 노트를 써야 한다. 당신은 편리하다고 언제든지 연인과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장거리 연애를 하겠는가, 아니면 얼굴을 보려면 차를 타고 먼길을 걸어 만나러 가야 하지만 실제를 보고 만질 수 있는 진짜 연애를 하겠는가. 내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노트를 소유하는 것의 가치와 소중함은 격이 다르다. 내 보잘것없는 개인적인 경험만 봐도 실제 종이에 펜을 쥐고 쓰는 글은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는 것보다 더 진한 글을 남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은신처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안네 프랭크는 자신의 노트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당신에게라면 내 마음 속의 비밀들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 내 마음의 지주가 되어 나를 격려해주세요."




아래는 간단히 비망록을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1) 새 노트를 하나 준비한다. 그리고 겉표지에 유성 사인펜으로 Commonplace Book이라고 적는다. 한글로 비망록이라고 적어도 되고 한문으로 備忘錄이라고 적어도 된다. 아니면 그냥 아주 흔한 것들의 책이라고 적어도 된다. 뭐라고 적던 그건 내 마음이다. 이건 내 거니까.


2) 첫 장은 비워둔다. 비망록을 채워가면서 목차로 사용한다.


3) 두 번째 장을 넘기고 왼쪽 페이지부터 내 생각들을 기록해간다. 왼쪽 페이지 위에 주제를 적는다. 주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주제가 될 수도 있고 (이런 경우는 그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좋은 할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하여, " "아이들 교육에 대하여, " "글 쓰는 행위에 대하여, " "아내가 사랑스러운 이유에 대하여" 같은 주제에 대해 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4) 새로운 주제를 시작할 땐 이미 기록을 시작한 주제에 충분한 페이지를 남겨두고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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