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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an 02. 2023

2022년 마지막 날, 책 위에 쌓인 먼지를 털었다

언젠가 어느 노총각 연예인의 집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휑한 거실에는 안마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런 풍경을 보던 여자 패널들은 안쓰러운 미소를 짓거나 노총각의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노총각과 안마의자의 상관관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도 이제 만약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노총각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얼마 전 한 안마의자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연말 스페셜! 계약금 없이 매달 렌탈비만 내시면 됩니다!"


결혼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남자는 이 나이가 되면 안마의자가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걸까?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우리도 안마의자 하나 렌트할까?"

"그 큰 걸 어디에 놓게?"

"거실에?"

"아, 그럼 거실에 안마의자 놓고 자기 서재를 비울까?"


노총각과 안마의자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바로 노총각은 인테리어와 집안 공간사용의 효율성은 고려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거실에 안마의자를 놓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난, 안마의자 백 개보다 아내가 있는 것이 더 좋다.




2년 전 난생처음 내 집을 갖게 됐을 때, 나는 제일 먼저 방 하나를 내 서재로 찜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쪽 벽에 책장을 들이고 책장이 늘어선 벽을 등지고 내 책상을 놓았다. 그리고 월세를 살며 이사를 다닐 때는 항상 부담스러웠던 책들을 가지런히 책장에 꽂고, 그동안 공간이 없어서 가져오지 못한 부모님 댁에 있는 책들도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 서재에는 공간이 부족해졌고, 박스에서 채 꺼내지 못한 책들은 거실 한편에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부모님 댁에 있는 책들은 옮겨오는 것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내 컴퓨터엔 항상 진화하며 커져가는 있는 "큰 꿈"이라는 파일이 있는데, 거기에는 내가 갖고 싶은 것과 이루고 싶은 것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서재가 있는 내 집"을 갖는 것이다. 나는 융자의 힘을 (아주, 굉장히 많이) 빌려 내 예상보다 비교적 빨리 그 꿈을 이뤘는데, 꿈을 이루고 나서야 알게 됐다. 바로 진짜 내 꿈은 "아주 (아주) 큰" 서재가 있는 집을 갖는 것이었다는 것을.




내가 사는 시애틀에서 3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부모님 댁에는 아직 가져오지 못한 책들이 책장 세 개 분량 남짓 남아 있다. 꼼꼼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단행본만 700여 권 정도 되려나. 가끔 부모님 댁에 가서 그 책들을 볼 때면 마치 고아원에 아이를 맡겨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더 큰 집 사면 꼭 데리러 올게.'


2022년 마지막 주말, 나는 부모님 댁 책장 앞에 서서 두고 온 책들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찬찬히 제목들을 읽다 보니 그 책들을 읽었을 때 기억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한 때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친구가 독립 시트콤을 제작할 예정인데 시나리오를 써줄 수 있겠냐고 부탁해서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려고 구입했던 코미디 시나리오 관련 책들.


한때 중국 고전을 다 읽어 버리겠다며 사놓고 다 읽지는 않았던 『홍루몽』 세트. (읽지는 않았지만 홍콩 친구와 책 이야기를 할 때 홍루몽을 아는 척하며 뿌듯하긴 했다)


기독교 집안에 있기에는 조금 불경스러운 허영만 작가의 관상에 관한 만화, 『꼴』 시리즈 (하지만 관상은 과학이라던데?!)


한때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구독하며 알게 된 고도원 님의 책 시리즈.


얼마나 연애가 하고 싶었으면 10권 넘게 사둔 연애 책들.


제목이 참 마음에 드는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책과 노니는 집』.


사업을 해보겠다며 구입한 『창업자의 딜레마』, 『포지셔닝 불변의 법칙』, 『존중받는 직원이 일을 즐긴다』를 포함한 비즈니스/마케팅 관련 책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포함한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책 거의 모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을 포함한 공지영 작가의 책들. (공지영 작가는 창비, 푸른숲, 오픈하우스, 소담 등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했는데 중간에 작가와 출판사 사이에 무슨 트러블이 있었나?라는 쓸데없는 생각)


당시 읽으며 참 망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아내가 결혼했다』.


다시 제목만 봐도 눈물이 글썽여지는 조창인 작가의 『가시고기』.


『생각 버리기 연습』, 『메모의 기술』,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포함한 자기 계발서들. (하지만 난 여전히 생각이 너무 많고, 꼭 필요한 메모는 못하고, 리드할 만큼의 리딩은 아직 못하고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며 알게 된 김진명 작가의 소설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그리고 『연금술사』처럼 마치 지혜로운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은 책들.


사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은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단테의『신곡 (The Inferno)』,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따위의 영문판 고전들.


두 번을 읽지 않을 것 같진 않지만 왠지 버리기는 아까운 조디 피코(Jodi Picoult)와 제임스 패터슨(James Patterson)의 소설들.


한때 온라인 비즈니스를 하겠다며 사둔 온라인 비즈니스 관련 책들.


이모부가 쓰신 여행기들, 부모님이 아시는 분이 쓰신 에세이집.


굉장히 많은 기독교 서적과 성경, 그리고 성경 주석들.


1권을 찾을 수 없어져 버려 굉장히 찝찝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2-10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묘사해 주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 그리고 여러 발터 뫼르스의 소설들.


그 외 어릴 적 기억 속 아버지 서재의 한편도 가득 메웠던 기독교 잡지 《목회와 신학》. 아까워 버리지 못한 대학교 텍스트북, 군대 매뉴얼, 영어공부 책 등등.




책들을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책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책들에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무선 청소기를 꺼내어 책이 상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책 위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있었니 얘들아. 



김춘수 시인은 그의 시 '꽃'에 이렇게 썼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책장 속 책들을 잊고 살았을 때,

책들은 다만

먼지 쌓인 물건들에 불과했다.


내가 책들을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책들은 나에게로 와서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책 위 먼지를 털다 보니 분류가 잘 되어있지 않은 책들이 눈에 띄어 다시 정리해 꽂아 주었다. 그러다 두툼한 봉투가 끼어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는데, 엄마가 끼워두신 비상금 같았다. 그래서 혹시 나중에 못 찾으실까 봐 엄마를 불러 봉투가 든 책을 여기로 옮겨 놓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엄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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