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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Mar 22. 2024

손주가 본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차이점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기억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넘치는 사랑을 주셨다.


하지만 우리 엄마한테는 어떠셨을까?


물론 난 우리 엄마가 아니니까 우리 엄마에게 두 분이 진짜 어떠셨는지 모른다. 단지 본 게 몇 가지 있을 뿐이다.


그렇다. 애들 눈이 이렇게 무섭다. 어려도 볼 건 다 보고, 기억력도 좋다. 이렇게 몇십 년이 지나면 글도 쓴다.






우리 친할머니, 우리 엄마의 시어머니


때는 바야흐로 20세기말,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당시 친할아버지는 안 계시고 친할머니만 살아계셨다.


그런데 효도에는 장유유서가 없다고 했던가? 우리 아버지는 딸 넷에 아들 셋, 7남매 중에서 다섯째, 아들 셋 중엔 막내셨는데, 아버지가 친할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다. 덕분에 우리 엄마는 대장암 투병을 하셨던 할머니 병시중을 끝까지 드셨다.


내 기억 속 친할머니는 항상 할머니 방에 계시거나, 거실에서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엄마는 할머니 식사를 챙겨드리고 손님들과 드실 다과를 내다 드렸다.


친할머니는 매일 새벽 교회로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셨다. 매일 새벽 우리 엄마는 한 손으로 할머니를 부축하고, 다른 한 손엔 할머니가 드실 물 컵을 들고 할머니와 동행했다. 할머니는 아들딸과 손주들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하셨다.


내 2학년 여름이었던가, 강원도 철원에 살던 형과 나는 서울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 풍족한 서울 외할머니 댁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철원에서 전화가 왔다.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였다.


형과 나는 그날 밤 바로 철원으로 돌아갔고, 집에는 평소 못 보던 어른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처음 보는 고모들과 큰아버지들도 계셨다. 항상 할머니가 계시던 할머니 방에는, 무언가에 싸인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그 방에 할머니가 앉아 계시지 않으니 뭔가 이상했다. 방 한쪽에서는 고모들이 계속 울고 있었다.


엄마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할머니 방에 앉아 계시는 어른들을 챙기셨다. 그러다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을 때, 엄마는 형과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돌아가시던 날, 할머니는 하루종일 애들은 서울에서 언제 오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다고 했다.


내 생에 처음 겪는 죽음은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슬프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았다. 눈을 질끈 감고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려보려 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할머니에게 죄송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모들은 며칠을 우리 집에 계셨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고모들은 소리를 지르며 우리 엄마를 혼냈다. 무슨 일인진 몰랐지만 처음 보는 고모들이 엄마를 혼내는 게 화났다. 항상 할머니를 먹여드리고 씻겨드리고 입혀드리던 우리 엄마가 고모들보다 할머니를 더 사랑했을 텐데,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더 슬플 텐데, 고모들은 우리 엄마한테 왜 저러는 걸까. 물론 어른들은 닫힌 방문 뒤에서 그러셨지만, 애들은 다 안다.


그날 엄마가 왜 혼나야 했는지 알게 된 건 내가 나이를 먹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친할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물려주신 반지를 얼른 내놓으라고 어떤 고모가 호통을 쳤던 거였다고 했다. 엄마는 쿨하게 형님 가져가시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외할머니, 우리 엄마의 친정엄마


다시 바야흐로 20세기말, 아들 둘에 5남매 중에서 셋째, 중엔 첫째셨던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큰 3층집에 사셨다. 어린 내 기억 속 외할아버지는 항상 주머니에 현금 뭉치를 넣고 다니시는 부자셨다. 명절마다 외갓집에 가면 모든 게 풍족했다.


결혼 전 서울에 살던 우리 엄마는, 결혼 후 강원도 철원에서 아들 둘을 키우면서 시어머니를 임종 때까지 모셨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늦둥이 막내가 태어났고, 엄마는 아들 셋을 키웠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겨울,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함께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이민이었지만, 아버지는 곧 다시 한국에 돌아가셔야 했고, 엄마 혼자 미국에서 아들 셋을 키워야 했다.


이민 초기 우린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부자 고모집에서 얹혀 산 적이 있다. 그리고 난 거기서 또 엄마가 고모에게 혼나는 걸 봐야 했다. 이땐 부자 고모가 뭐 때문에 엄마를 그렇게 혼내는지 문 뒤에서 똑똑히 들었다.


왜 전기장판을 안 끄고 하루 종일 켜두냐고, 전기세 아까운 줄 모르는 그런 정신머리로는 미국에서 못 살아남는다며 고모는 우리 엄마를 혼냈다. 하지만 난 다 봤다. 그날 낮에, 결혼고모 딸이 집에 놀러 와서는 자기가 예전에 쓰던, 당시 우리 엄마가 쓰던 침대에 들어가서 전기장판을 켜는 걸.


아무튼 시간이 흘러, 엄마와 우리 삼 형제는 미국에서 따로 아파트를 얻어서 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전기장판 펑펑 뜨끈하게 틀어놓고 등 따습게 살아도 미국에서는 잘 살아졌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십 년 가까이 딸과 손주들을 못 본 외할머니가 미국에 놀러 오셨다. 오래된 아파트에 좁은 부엌, 그리고 작은 냉장고. 할머니는 딸이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던 건지 고급 삼성 냉장고를 사주셨다. 먹을 거라도 잔뜩 쟁여놓고 먹으라는 마음이셨을까.


 그렇게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새벽에 목이 말라 잠이 깨서 부엌에 갔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는 그 어두운 부엌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차가운 미국 부엌 바닥에 외할머니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그게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손주가 본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차이점


한낱 어린애가 어른들의 일을 뭘 알겠냐마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어린 시절 기억은  마음에 남는다. 그게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내가 우리 엄마를 혼낸 고모들에게 아직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어른이 되고 나니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일이 있다. 그리고 친가 어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미국에 발을 붙이기도 어려웠을 거다.


어리고 여렸던 폴챙이가 슬프고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그 모든 일들은, 나라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쌓여가는 벽돌이었다. 그런 벽돌들이 쌓여 지어져 가고 있는 나는, 이젠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쉽게 날아가지 않는 벽돌집이 되었다.


그래서, 손주가 본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차이점은 뭘까?


먼저 공통점이라면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두 분 다 기도하는 분이셨다는 거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은 시어머니는 기도하러 가실 때 며느리에게 물컵을 들게 했지만, 친정엄마는 딸을 자게 놔두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셨다는 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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