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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Mar 08. 2024

재미교포는 어디까지 부끄러워해야 할까?



난 어릴 적 미국에 온 재미교포다. 한국에서 태어나 만 12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에서 초·중·고·대학교를 졸업했고, 이제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한국에서의 시간의 두 배를 넘겼다.


12살은 이민오기 참 애매한 나이다. 몇 년만 일찍 왔다면 악센트 없이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테고, 몇 년만 늦게 왔다면 그래도 어른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난 둘 다 어려웠다.


이민 초기, 영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지만, 난 비록 미국에 살아도 "I am Korean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한국어를 구사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내 한국어 구사력도 따라 늘기를 바랐다.


그런데 영어를 배우기도 벅찬 마당에 한글 국어사전까지 들여다보는 괜한 사서 고생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면 나처럼 한국인의 피부를 가졌지만 영어가 유창한 2세 친구들에 대한 시기심이었을까. 나는 자기가 코리안이라고 말은 하면서 한국어를 더듬거리는 2세 친구들을 내심 속으로 무시했다. 뿌리를 잊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좀 아는 미군


시간이 지나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육군 장교가 됐다. 영어도 미국에서 밥 벌어먹을 수 있을 만큼은 할 수 있게 됐다.


미군에는 "국방 언어 능력 시험(Defense Language Proficiency Test)"이라는 외국어 능력시험이 있다. 나는 보병 장교라 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지만, 굳이 자원해서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다. 그리고 만점을 받았고, 만족했다. 그래, 난 내 나이에 부끄럽지 않은 한국어 실력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난 동료들 사이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잘 아는 사람으로 통했다. 태생만 한국인이 아닌, 진짜 한국인 같은, 뭘 좀 아는 코리안 아메리칸. 아직도 한국 사람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사람에겐 그런 건 개소리라고 알려줬고, 대한민국이 아직도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때처럼 가난한 줄 아는 사람에겐 서울에 비하면 네 고향 도시는 깡촌이라고 알려줬다. 한국 얘기가 나올 때면 마치 미군 상주 한국 대사라도 된 것처럼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태극기도 설명 못하는 코리안


그렇게 한국인부심으로 가득 찬 미군이었던 나는 2021년 폴란드로 파병을 가게 됐다. 몇 개월을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변두리에서 근무하다, 친한 동료들과 함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관광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역시 한 나라의 수도라 관광객이 많았는데,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외국어 통역 서비스가 있다는 안내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반가운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 통역 서비스가 있다는 말과 함께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친한 동료에게 저거 보라며 저게 한국 국기라고 알려줬다.


동료는 태극기가 신기하게 생겼다며 태극기 안에 있는 문양들은 어떤 의미인지 내게 물었다. 순간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빨강과 파랑이 태극 문양이라는 건 알았지만, 네 모서리에 있는 문양들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른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하게 됐다. 당황한 나는, 가운데 빨강 파랑으로 된 원은 코리안 마크이고, 모서리의 문양들에도 의미가 있지만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동료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인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성조기의 50개의 별은 미국의 50개의 주를 상징한다는 것과, 빨갛고 흰 13개의 줄은 미국 독립 당시 연방주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코리안" 아메리칸임에 자부심을 갖던 내가 한국 국기의 의미도 모른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동안 부끄러움을 떨치지 못했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태극기의 의미를 찾아봤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 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한다. 이들 4 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 대한민국 행정안정부 - 태극기의 내력과 담긴 뜻






코리안 아메리칸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재외동포"라고 한다.


그리고 나처럼 미국 국적을 취득한 재외동포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영어로 "코리안 아메리칸(Korean American)"이라고 한다.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말에서 코리안은 형용사, 아메리칸은 명사다.


명사는 존재이고, 형용사는 그 존재를 설명하는 단어다. "좋은 사람"처럼 말이다.


Korean이 형용사로 사용될 땐 "한국적인"이라는 뜻이 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코리안은 나의 명사였지만, 이젠 형용사가 되었다.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코리안


최소한의 한국사』라는 책이 있다. 마치 "한국인이라면 이 정도 역사는 알아야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최소한의 한국사처럼, 한국적인 아메리칸, 한국적인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한국적임(being Korean)이란 것도 있을까?


그렇다면 재미교포는 비록 미국에 살지만 무엇을 잃지 않아야, 그리고 무엇을 갖춰야 나는 코리안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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