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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Mar 16. 2024

후원자 없이 고아 같은 우리 에세이 작가들

그리고 상금 150만 원의 에세이 공모전



패트론과 클라이언트


영어로 클라이언트(client)라는 단어는, 변호사·회계사 같은 전문가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의뢰인(고객)을 지칭하는 말이다. 클라이언트는 전문가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돈을 지불한다.


클라이언트라는 단어는 라틴어 "cliens"에서 파생됐는데, 이 말은 과거 로마에서 "고객"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던 말이다. 요즘 클라이언트는 돈을 지불하지만, 과거 클라이언트는 경제적 후원을 받는 사람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클라이언트는 후원자라는 뜻을 가진 패트론(patron, 라틴어 "patronus")과 후원 관계를 맺었다. 지위·경제적 능력이 높은 패트론이 잠재력 있는 클라이언트를 후원했다.


패트론&클라이언트 관계의 한 예로, 후원자와 예술가가 맺는 관계가 있다. 스스로 생계도 유지할 수 없던 한 미술가가 그 잠재성을 알아본 패트론의 도움으로 예술활동을 지속한다. 결국 클라이언트는 예술 활동에 꽃을 피우고, 그의 패트론은 훌륭한 미술가를 후원한 사람이라는 명망을 얻는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패트론에게 헌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미술관·박물관·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을 영어로 패트론이라고 부른다.)


만약 패트론이 후원하는 클라이언트가 유명한 예술가가 되지 않더라도, 패트론은 미술의 후원자라는 고상한 이미지 (혹은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클라이언트가 일방적 지원을 받지만, 결국에는 서로에게 유익하고 대개 평생 지속되는 윈윈 관계였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기부와는 다른 의미의 후원이다.






요즘 문학계의 패트론과 클라이언트


과거 패트론/클라이언트 관계를 요즘 시대에 적용하면 영화감독과 투자자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요즘 후원에는 과거의 순수함이 사라진 것 같지만 말이다.


이 관계는 문학계에도 존재하는데, 요즘은 명성이 많이 줄어든 신춘문예가 그 예다. 신춘문예를 주최하는 신문사는(패트론은) 상금을 써가며 무명작가들의 집필을 후원한다. (물론 예전 로마처럼 성공할 때까지 묵묵히 도와주는 든든한 후원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실력을 증명해야 주어지는 후원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신인 작가는 작가라는 타이틀과 상금을 얻게 되고, 신문사는 문학의 옹호자와 어느 작가를 배출한 신문사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에세이는 후원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신인 작가를 후원하는 신춘문예에서 에세이(수필) 작가가 설 자리는 거의 없다. 2024년 신춘문예 32개 중 단 5개(15%)만이 에세이(수필) 응모를 받았다. 에세이 응모를 받는 공모전에서도 에세이 작품의 수상금은 소설과 시에 비해 낮았다.


지난해,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4조 6천억 원 삭감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결정에 수많은 국민들이 이러다 최첨단 산업경쟁력을 잃고 나라가 망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연구개발은 비록 지금 당장 효과를 보지 못해도 투자를 해야 하는 곳이다. 국가가 투자를 안 하면 젊은 인재들은 그 분야로 뛰어들지 않고, 이미 그 분야에 뛰어든 인재들도 자신을 인정해 주고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다른 나라로 떠나간다.


물론 에세이에 대한 후원을 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구개발(R&D)에 투자하지 않으면 산업이 발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에세이에 투자하지 않으면 이 나라에는 유능한 에세이 작가가 나올 수 없고, 사회는 한글로 된 좋은 에세이를 만날 수 없다.


여기까지 얘기가 나오면 이런 생각이 든다. 소설은 뭔지 알겠고, 시도 뭔지 알겠는데, 도대체 에세이는 어디다 써먹는 건데? 잘 쓴 소설은 외국어로 번역해 수출이라도 할 수 있는데, 에세이는 도대체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데?


에세이의 쓸모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선 (단 한 편으로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문학적 에세이" 장르와 시장이 크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외국 상황은 어떨까?


우리가 본토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많이 읽는 작가 마크 트웨인과 헤밍웨이는 소설을 썼지만 동시에 에세이 작가였다. 사상가이자 작가인 제임스 볼드윈도 에세이를 썼고, 인종차별을 위해 애썼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도 문학적 에세이를 썼다.


문학적 에세이는 소설을 읽는 것보다 높은 문해력을 요구하지만 논문처럼 딱딱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 문학이 주는 엔터테인먼트적 재미를 담고 있다. 미국에선 소설은 누구나 읽고 시는 소수가 읽지만, 교양 있는 지성인들은 문학적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그래서 누구나 아는 뉴욕타임스, 타임(TIME), 하버드 대학이 발행하는 하버드 리뷰, 예일 대학이 발행하는 예일 리뷰, 문예지 하퍼스 리뷰 등의 언론사와 매체들이 문학적 에세이를 정기적으로 싣고 후원한다.


에세이의 장점은 누구나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적 에세이는 독자를 사색하게 만드는 쓸모 있는 에세이를 소설이나 시처럼 읽고 싶은 문학적 언어에 담는다.


대한민국에 자신의 생각을 남이 읽고 싶은 문장에 담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가들이 많아지고 그런 글을 읽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이 나라 평균 사고력의 깊이가 한층 향상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읽고 사색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이끌게 된다면, (아주 어쩌면)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4조 6천억 원이나 삭감되어 국민 얼굴이 사색으로 뒤덮이는 일이 줄어들지는 않을까?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에세이 후원, 그래서 얼마면 되는데?


그래서 도대체 대한민국의 문학적 에세이 발전을 위해서 뭘 어떻게 후원해야 할까?


문학적 에세이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라고 불리는 1533년 생 프랑스 사람 몽테뉴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성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하고 무려 8년 동안이나 에세이를 썼다. (참고: 에세이의 아버지 몽테뉴가 알려주는 에세이의 뜻)


물론 잠재력 있는 작가가 몽테뉴 같은 금수저처럼 글만 쓸 수 있도록 오랜 기간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없이 좋을 거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부디 저에게 이메일을.) 그러면 제2의 에세이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적인 에세이 작가가 대한민국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통 큰 후원자가 있을 리 없고, 8년 동안이나 작품 발표 없이 후원이나 받을 만큼 염치없는 작가가 있을 리도 없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문학해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거 다 아는데, 에세이 작가가 너무 큰 걸 바라진 않을 거다. 단지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도록 에세이가 설 수 있는 자리, 노력해서 쓴 작품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 그 정도로만 시작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작가들이 득세하는 브런치스토리, 참 잘하고 있다.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에세이 공모전


리스펙(respect)이라는, 누군가를 인정할 때 쓰는 말이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에세이 공모전을 열어주는 단체들을 리스펙 한다. 대형 신문사도 에세이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잘 쓴 단 한 편의 에세이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상을 주는 에세이 공모전들을 응원하고 칭찬한다.


특히 돈 안 되는 일은 리스펙 할만한 일로 여겨주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에세이 작가가 당당할 수 있을 만큼의 액수인 100만 원 이상의 상금을 후원하는 단체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신문사들도 못하는 일을 작은 단체와 문인협회들이 해내고 있다.


그중 하나로 올해로 20년째 공모전을 열고 있는 한국문인협회 계룡시지부가 있다. 올해는 각 부문 대상에 상금 150만 원을 지급하며, 에세이(수필) 부문도 포함되어 있다. 공모는 다음 주 일요일, 2024년 3월 24일에 마감된다. (참고: 제20회 사계 김장생 신인문학상 작품 공모)


브런치스토리에는 출중한 에세이 작가들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저 착한 공모전 주최 측에 응모작 폭탄을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더불어 앞으로 대한민국에 좋은 문학적 에세이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본다. 내가 더 읽고 싶어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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