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란 어떤 글일까?
에세이. 어떤 글인지 느낌은 오지만 그래서 그게 도대체 어떤 글이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제 누가 물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에세이의 뜻을 알려드립니다.
단어의 뜻이 궁금할 땐 먼저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게 좋겠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에세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세이(essay)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다.
산문 형식의 글, 경수필, 중수필. 에세이 뜻을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문학전공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천천히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지만 여전히 헷갈립니다. 게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에세이"와 완전히 똑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세 개나 더 있습니다: 수필, 만문, 상화. 이 중에서 수필이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보셨죠? 에세이라는 단어가 흔히 쓰이기 전에는 수필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여전히 문예공모전에는 에세이보다 수필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하지만 요즘 책이나 SNS를 보면 수필이라는 말보다 에세이가 더 많이 쓰이고 익숙한 것 같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와 있듯 에세이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 essay에서 유래된 외래어입니다. 그리고 영단어 에세이도 프랑스어 essai(에세)에서 유래된 외래어입니다.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1533년에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지방에서 태어난 미셸 드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라는 사람입니다. 흔히 "몽테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을 에세이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요. 에세이의 아버지 몽테뉴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에세이가 어떤 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는 조선 11대 왕 정종이 다스리던 1533년,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유력한 집안에서 몽테뉴가 태어났습니다. 먼저 몽테뉴의 집안을 거슬러 올라가보죠.
몽테뉴의 증조부 '라몽 에켐(Ramon Eyquem)'은 절인 생선과 포도주 같은 물품 유통사업으로 가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사업으로 번 돈으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몽테뉴 영지를 매입하죠. 에켐 가문이 몽테뉴 영지의 지주가 된 이때부터 '에켐' 가문 이름 뒤에 '몽테뉴의 누구누구'라는 뜻을 가진 'de Montaigne'이라는 호칭이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몽테뉴의 이름 "미셸 드 몽테뉴"는 "몽테뉴의 미셸"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경주 최부자" 느낌이랄까요) 몽테뉴의 공식 이름은 원래 증조부의 성이 들어간 '몽테뉴의 영주 미셸 에켐 (Michel Eyquem, Seigneur de Montaigne)'이지만 지금은 보통 '미셸 몽테뉴' 혹은 그저 '몽테뉴'라고 흔히 부릅니다.
몽테뉴 가문은 몽테뉴 영지 매입 후에도 부와 명예를 늘려가며 보르도 지역의 유력한 집안이 됩니다. 증조부는 사업을 일으켜 영지를 매입하고, 조부는 사업을 크게 확장해 여러 건물과 자산을 사들였죠. 이런 부잣집에서 태어난 몽테뉴의 아버지 '피에르 에켐(Pierre Eyquem)'은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당시 귀족 계급의 직업이었던 군인이 됩니다. 군인이 되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전쟁에 참전도 하고, 그 후에는 보르도의 시장이 됩니다. 몽테뉴가 태어난 1533년, 몽테뉴 집안은 이미 돈과 명예 둘 다 손에 쥔 가문이었습니다. 몽테뉴의 어머니도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죠.
증조부: 라몽 에켐 (Ramon Eyquem) - 집안 사업을 일으킴, 몽테뉴 영지 매입
조부: 그리몽 에켐 (Grimond Eyquem) - 집안 사업 크게 확장, 보르도 지역 여러 건물/자신 매입
부: 피에르 에켐 (Pierre Eyquem, Seigneur of Montaigne) - 군인, 보르도 시장
몽테뉴: 미셸 드 몽테뉴 (Michel Eyquem, Seigneude Montaigne) - 법관, 보드로 시장, 세계 최초의 에세이 작가
몽테뉴는 돈과 명예가 있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라게 됩니다. 특히 몽테뉴의 아버지는 아들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요. 몽테뉴는 생애 첫 3년을 시골 작은 오두막에서 서민들과 함께 '가장 소박하고 평범하게' 길러집니다. 몽테뉴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과 익숙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죠. 이 첫 3년 후, 몽테뉴 영지로 돌아온 어린 몽테뉴는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특별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어린 몽테뉴의 모국어가 당시 르네상스 지성인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가정교사를 고용해 라틴어로 아이를 교육합니다. 주위 사람들도 어린 몽테뉴 앞에서는 라틴어만 사용하게 했죠.
이런 얘기를 들으면 몽테뉴의 아버지가 차갑고 엄격한 사람이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에 대한 철학을 갖고 각별한 신경을 썼을 뿐, 배려심이 많은 아버지였죠. 한 예로 몽테뉴의 아버지 피에르 에켐은 아침에 아들을 깨울 때면 아이가 놀라지 않게 음악가들에게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고 합니다. 훗날 몽테뉴는 자신의 교육환경을 떠올리며 "어떤 가혹함이나 강요 없이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공부할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아버지를 "너무도 선량하셨던" 분이라고 쓰기도 하죠.
몽테뉴는 6살에 기숙 명문 학교 '콜레쥐 드 기엔 (Collège de Guyenne)'에 입학해 12년 교육 과정을 7년 만에 마치고 13살에 졸업합니다. 그 후 철학과 법학을 공부해 21살에 법관이 되어 법원에서 근무를 시작하죠.
법원에서 법관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몽테뉴는 소울메이트 에티엔 드 라 보에시 (Étienne de La Boétie)를 만나게 됩니다. 몽테뉴보다 3살이 많았던 라 보에시는 정치적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는데, 몽테뉴는 이 사람에게 강한 우정의 끌림을 느낍니다.
몽테뉴는 <우정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라 보에시와의 우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한 키워 갈 우정, 분명 책에서도 읽기 어렵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주고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충만하고 완벽한 우정... 그런 우정이 만들어지려면 너무도 많은 우연이 쌓여야 하는 것이니, 삼 세기에 한 번 이루어진다 해도 큰 행운이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몽테뉴와는 달리 라 보에시는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삼촌에게 길러진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도 불구하고 말이 너무나 잘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몽테뉴는 라 보에시에 대한 그의 끌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일 나더러 왜 그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가 그였기 때문에, 내가 나였기 때문에'라고."
하지만 모든 좋은 것은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라 보에시는 몽테뉴를 만난 지 5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친구 몽테뉴에게 자신의 책 컬렉션과 자신이 쓴 글들을 남겨주고는 몽테뉴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내 자리도 있겠지?" 혹자는 몽테뉴의 에세이 <우정에 관하여>가 몽테뉴가 친구의 질문에 "네 자리는 여기에 있어."라고 말해주는 대답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라 보에시를 기리며 쓴 이 에세이는 몽테뉴의 『에세 1권』 정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랑하던 친구 라 보에시를 먼저 떠나보낸 몽테뉴는 큰 상실감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그와 깊이 나누었던 대화의 부재가 그의 삶을 텅 비게 만들었죠. 훗날 그는 유럽 여행기 『여행 일기』에서 "라 보에시 경에 대한 생각에 하도 깊이 빠져들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오랫동안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몽테뉴가 '선하신 아버지'라고 표현했던 아버지, 남동생, 그리고 몽테뉴의 첫째 딸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죠. 몽테뉴는 이때의 심정을 "매 순간 죽음이 우리의 멱살을 쥐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와 아버지를 떠나보낸 몽테뉴. 그는 마치 그들의 유언을 수행하듯, 아버지가 생전 번역을 부탁했던 책과 친구 라 보에시의 논문을 간행한 뒤, 법관직을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몽테뉴 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성에 있는 타워 4층에 서재를 꾸미고, 친구 라 보에시에게 물려받은 책들을 포함한 100여 권의 책들과 그곳에 은거하며, 그를 '에세이의 아버지'로 만들어 준 에세이집 『에세』의 집필을 시작합니다. 39살에 쓰기 시작한 그의 에세이집은 무려 8년 후인 몽테뉴 나이 47살이 되던 해인 1580년 세상에 나오게 되죠.
자, 그럼 '에세이의 아버지' 몽테뉴는 어떤 글을 썼을까요? 자신의 글을 "에세이"라고 불렀던 몽테뉴의 글을 살펴보면 에세이가 어떤 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몽테뉴가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사랑했던 친구 라 보에시와의 대화가 더 이상 불가능 했기 때문입니다. 몽테뉴는 말년에 라 보에시를 떠올리며, 만약 "예전처럼 나를 지지하고 고양시키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에세이를 쓰는 대신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썼을 거라고 말합니다. 깊은 대화 상대를 잃은 몽테뉴는 새로운 대화 상대로 에세이 독자를 선택했던 것이죠. 그래서 에세이는 친구에게 말하듯 친밀하고 솔직합니다.
몽테뉴는 그의 에세이집을 시작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그저 내 집안사람들과 친구들을 위해, 내가 세상을 떠난 뒤(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니) 내 처신이나 성격의 특징들을 여기서 찾아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더 온전하고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꾸밈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보통 때의 내 모습을 봐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려 보이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친밀한 글이지만, 동시에 친구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읽힐 목적으로 쓰인 글입니다. 몽테뉴는 에세이집 서문에 "그저 내 집안사람들과 친구들"이 자신을 더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에세이를 썼다고 아주 쿨하게 얘기하지만, 사실 그 외의 사람들도 자신의 글을 읽을 것을 예상하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만약 가족과 친구들에게만 읽힐 글을 쓴 것이라면 에세이집 서두에 "독자에게"라는 글을 먼저 쓰지도 않았겠죠. 또한 그는 독자에게 자신의 에세이집을 소개하며 "공공에 대한 예의가 내게 허락했던 한에서" 에세이를 썼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실제로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만한 글을 썼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그의 글이 솔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만약 독자의 시선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장담컨대 나는 정녕 기꺼이 나를 통째로 적나라하게 그렸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몽테뉴가 독자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솔직함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연재글에서 살피겠지만, 몽테뉴는 에세이에서 그의 의견을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대중 앞에서는 꺼려지지만 친구에게는 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은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 수 없는 것처럼, "독자에게" 미리 밑밥을 깔아 둡니다:
"독자여, 나 자신이 내 책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그대의 한가한 시간을 쓰는 것은 당치 않다."
나는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니 이 책을 읽지 말라고 말이죠. 읽지 말라고 말했으니 그 후에 오는 책임은 독자의 몫이라고요.
부자 귀족 집안 출신, 13살에 고등학교 졸업, 21살에 법관 취직. 39살에 조기 은퇴를 하고 8년 동안이나 집에 틀여 박혀 돈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 이런 사람이 에세이의 아버지라니. 왠지 에세이 쓰기의 장벽이 높아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몽테뉴의 에세이들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몽테뉴는 자신 모습 그대로 자신이 접한 책, 풍문·소문, 그 당시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경험들이 마음속에 만들어 낸 움직임들을 글에 담아냈던 것뿐이죠. 우리는 그저 우리 시대의 책, 소문, 역사적 사실, 그리고 각 개인의 경험이 각자 안에 만들에 내는 움직임들을 기록하면 됩니다. 독자들을 배려한 '잘 읽히는 글'로 다듬어서 말이죠.
이 글은 민음사(2022)에서 출간된 『에세 1~3 권』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