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 몽테뉴가 시작한 에세이라는 문학 장르. 에세이를 쓰려면 왠지 대단한 사람이어야 할 것 같고, 아주 특별하고 유별난 경험이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세이는 전혀 그런 글이 아니라고, 당신도 쓸 수 있다고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에세이가 무언가를 가르치는 글이라면 누구나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에세이는 그런 글이 아닙니다.
만약 에세이가 소설이나 시 같은 순수문학이라면 또 아무나 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글을 쓰는 데는 어떤 특별한 재능과 수련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에세이는 그런 글이 아닙니다.
에세이는 누군가를 가르치려고도, 나는 고귀한 예술 작품이라고 뽐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담담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고 차근차근 얘기해 줍니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말이죠.
에세이는 독자에게 자신을 읽어주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안 읽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읽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그저 내 생각을 적은 것뿐이니, 이 글을 읽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에세이를 읽은 후의 감상은 온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에세이는 이미 자신을 읽지 말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쓰면 됩니다.
만약 "은퇴 후 전원생활"에 대해 적은 에세이라면 그런 삶은 살고 있는, 혹은 살고 싶은 사람에게 동일하거나 유사한 삶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원한다면, 이 책은 꼭 읽어보셔야 해요"라며 자신을 마케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해 줍니다.
에세이는 독자 모객이나 독자 유치처럼 유치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높은 자존감으로 남눈치 보지 않으며 자기 삶을 살아내는 사람처럼, 그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독자의 자발적인 궁금함을 자아냅니다.
모든 에세이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 불완벽은 에세이의 문장일 수도, 에세이가 주장하는 핵심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에세이의 아버지" 몽테뉴는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에세이를 썼습니다. 그렇게나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나 공을 들여 쓴 에세이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몽테뉴도 에세이를 세상에 내어놓은 후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했으니까요. 평생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는 줏대 없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내 몸이 나이 들고, 생각이 바뀌어가고, 성숙해지듯이, 내가 쓴 에세이도 점점 변해갑니다. 내가 지금 에세이에 담았던 생각도 변해갑니다. 10년 후에 보면 지금의 에세이가 부끄러울지라도 지금 쓰는 에세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쓰기를 미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미성숙한 어린 시절이 비록 부끄러울지라도 지금의 나를 만든 것처럼, 지금의 에세이가 미래의 에세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쩌면 지금 쓰지 않으면 미래의 더 나은 에세이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완벽한 에세이란 아무도 쓸 수 없는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쓸 수 있는 최상의 에세이는 내가 "지금" 써낼 수 있는 에세이입니다. 모든 글은 수정할 수 있지만 에세이는 그 수정함에 있어 더욱 너그럽습니다.
누구나 운동을 해서 건강한 몸을 가질 수도, 누구나 매일 아침 명상을 할 수도, 누구나 자기 전에 양치를 할 수도 있지만 뭐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에세이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에세이를 쓸 수 있다고 모두가 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운동을 통해 건강을 얻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저는 당신에게 에세이를 권하고 싶습니다. 다음 주에는 당신이 에세이를 써야 하는 이유, 당신이 꼭 에세이를 썼으면 좋겠는 이유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당신이 에세이를 쓰는 일은 어쩌면 인류애 같은 대단한 목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