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Apr 20. 2023

하고픈 일을 하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온 뒤

입국장을 빠르게 나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때 기분이 참 묘했다. Paul 제공

10시간의 비행이 예상과는 다르게 편안히 지나갔다. 실감이 잘 나지 않았던 탓일까.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지인, 동료들과 주고 받은 연락에서도 나는 앞서 언급한 말을 계속 말했다. 게이트 앞 전광판에 목적지가 선명하게 보임에도 말이다. 진짜로 가는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는 표현이 딱 맞았었다. 그래서 긴 비행도 별 생각없이 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안내가 좌석 앞 화면을 통해 공지됐다. 활주로에는 호주를 영문으로 새긴 비행기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 왔다는 실감을 나게 해준 건 이런 픙경들이 아니었다. 비행기 문을 나서자마자 맡게 된 특유의 호주 냄새였다. 이후 입국 수속을 위해 재빠르게 움직이며 마주했던 ‘Welcome Sydney’란 문구가 마음 깊숙히 자리했던 그리움을 달래줬다.


공항을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달라진 점은 여권을 스캔해 옛 지하철 티켓 같은 스몰 여권을 발행해야 했다. 입국 게이트 앞에 기계가 설치돼 있길래 눈치껏 미리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심사장 앞에는 스몰 여권 발행을 위한 긴 줄이 있었다.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입국 심사를 마친 나는 짐을 찾으면 곧장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화된 정책으로 찾은 짐을 다시 검사해야 했다. 이 과정으로 심사대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심사대에서 제출해야 했던 입국카드는 도착 직전 작성했다. 국문이 모두 소진돼 영문으로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직업을 묻는 칸이 있었는데 약간의 고민을 했었다. 정직하게 적으면 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뭐 나쁜 일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있는 그대로 적자 싶어 기자라고 적었다. 심사대는 1번부터 6번까지 라인이 있었는데 6번은 승무원이나 전문직 등이 검사 없이 나가는 라인이었다. 한참 줄을 서다 내 차례가 됐고 입국카드를 본 공항 직원은 내게 기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니 6번으로 나가란다. 그렇게 공항을 나올 수 있었다.


통신사에서 유심 개통을 하고 어학연수 때부터 사용했던 교통카드를 충전한 뒤 트레인을 탔다. 출근 시간이 겹쳐 공항라인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내렸다. 복잡한 트레인 속 각종 영어 단어들이 난무하는 걸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곳에서 바쁘게 살았던 모습들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까먹고 있었던 익숙함들이 예고 없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순간이었다.


꿈을 찾지 못했던 20대 초중반 무렵 이곳에 와 시작점을 만들 수 있었다. 절대 가지 않겠다며 부모님의 권유를 끝내 거절했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땠을까. 3년 뒤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다시 방문해 꿈을 이루기 위한 결심을 다지지 않았다면 오늘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또 생각해봤다. 선택은 용기였고 기회는 준비했던 자에게 주어졌단 걸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오늘 아침 트레인이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정신이 없었다. 구석구석 달라진 도시의 모습들은 물론이고 연달아 잡아둔 약속을 위해 이리저리 다녔기 때문이다.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내일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차분하게 머물러야 할 곳에 시선이 닿으리라 예상해본다. 다음주가 되면 아마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에 많은 미련을 두겠지 싶다. 그래도 알찼다 스스로를 토닥거리기 위해 좀 더 사부작거려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문득 떠오른 그때 그 순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