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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y 24. 2023

17년 전으로 돌아갔던 찰나의 오후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지나버린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Paul 제공

미루던 주유를 하러가는 길에 하교하는 학생들을 보게 됐다. 무리를 지어 학교를 빠져나오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힘든 삶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복잡한 고민들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 나이에만 볼 수 있는 순수함을 감추긴 어려웠다. 이때가 좋은 시절이고 아무런 생각없이 공부만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내뱉는 나는 늙은 것인가 아니면 꼰대가 된 건가.


여러 일들을 처리한 뒤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까 봤던 학생들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래서 무언가에라도 홀린듯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들과 만들었던 포털 카페를 들어가봤다. 잊고 살았던 반가운 이름들이 등장했고 다들 뭐하면서 살까 때아닌 그리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친구들이 작성한 게시글들은 손발이 없어지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항마력을 붙들고 하나씩 읽는데 순수했던 그 시절이 참 오래 전이구나 싶었다.


친구들도 친구들이지만 당시 우리를 맡았던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선생님은 초임 때 첫 반으로 우리를 맡았었는데 그래서인지 남다른 열정과 애정을 1년 동안 주신 바 있다.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났는데 찾아볼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그 순간들을 그냥 넘겨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 계속 지나간 추억으로 둘 것 같았다. 알고 있던 이름 석자로 이른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가 된 것이다.


평소 잘 아는 초등학교 선생님께 이름 검색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약 60여명이 뜬단다. 하나씩 물어서 찾는 건 불가능했는데 다행히 초등 선생님들은 근처 지역으로만 옮겨다니니 그동안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이 계실 수 있다 생각했다. 이름과 나이를 바탕으로 주변 선생님들께 취재(?)를 진행하니 곧바로 "ㅇㅇ초등학교에 계신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럴 때면 내 직업이 꽤나 쓸모가 있다 싶기도 하다.


어쨌든 최종 확인은 해야 하니 그 학교 교무실로 전화를 걸어 A 선생님이 계시냐고 했다. 6학년 때 제자였는데 그곳에 계신 것 같아 문의한다며 말이다. 이후 전화를 돌려 A 선생님과 연결이 됐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A 선생님이 맞았다. 선생님께 "저 Paul입니다. 생각나서 연락드렸어요"라고 말씀드리니 연신 반가워하셨다. 집 근처 초등학교라 곧바로 찾아뵙겠다고 하니 기다리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약 17년 만에 만남이 성사됐다. 교실 앞에서 마주한 선생님은 쓰지 않던 안경을 쓰셨을 뿐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계셨다. 선생님 역시 "17년이나 지났는데 얼굴이 좀 변해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똑같은데?"라는 말을 건네셨다. 이후 15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기자가 됐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의사가 될 줄 알았더니. 요즘 여기저기 몸이 아픈데 공짜 진료를 기대했단 말이야"고 답하셨다. 같은 반 친구 1명도 기자가 됐다고 말씀드리니 "어쩌다 두명이나. 도움 필요하면 말할게"라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간의 시간을 모두 풀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생이 서른을 넘겨 사회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선생님은 감개가 무량하신 듯 했다. 잘 자랐다는 말 뒤에 한동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왠지 그 쉼표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잊고 있던 오랜 꿈을 기억해주신 선생님도 가끔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리우셨던 걸까. 옆반 선생님이 참한데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는 A 선생님의 추천은 제자가 이제 자신과 같은 어른이 됐음을 인정하는 동질감 같은 것이었을까.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실행에 옮기길 잘했다 싶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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