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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y 27. 2023

쉬는 날 최선을 다해 일한 자

거리를 거닐 때 매대에 있는 신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 어디선가 느끼는 동료애 때문이랄까. Paul 제공

야간 당직을 마치고 모처럼 휴무를 맞이한 어제였다. 여유롭게 늦잠을 잔 다음 점심 약속을 위해 광화문을 찾은 바 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약속 장소 주변을 서성이다가 좀 쉬기 위해 눈에 보이는 의자에 앉았을 찰나였다. 휴대전화를 열어 메신저를 확인하니 부장의 연락이 들어와 있었다. 혹시 광화문 주변에 있는 기자가 있으면 현장으로 가 사진을 좀 찍어줄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휴무에 회사 단체방을 들여다보는 어떤 도라희가 있냐고 생각하겠느냐만 이 직업은 휴가를 보내는 와중에도 취재를 나가는 사악한 업 아니겠는가. 솔직히 그냥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약속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현장을 갔다오면 되겠다 싶어 내가 가겠다 연락을 남겼다. 이후 현장에 도착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현장 인근에 있는 관계자들이 눈에 보였다. 순간 또 30초 가량 고민을 했었다.


내가 지나가는 관광객이나 시민도 아니고 유의미한 멘트를 관계자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드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갈 수 있겠나. 그래서 무작정 관계자에게 다가가 나를 소개한 뒤 취재를 시작했다. 기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명함이라도 달라는데 지갑도 없이 맨몸으로 현장에 갔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임시방편으로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기자페이지를 내밀었고 다행히 취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사가 출고됐고 오후까지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데스크는 기동성이 너무 좋았다며 감격스러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후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맞장구는 '앞으로 유념해 취재에 임하겠다' 정도다. 이땐 몰랐다. 독자들의 좋은 반응이 다음 업무가 돼 돌아올 줄 말이다. 한창 점심 약속을 하고 있는데 데스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주변 현장을 더 돌아볼 수 없냐는 것이었다. 분명 내가 휴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으나 현장이 기자의 휴무를 배려해 나타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더 좋은 야마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걸 데스크도 나도 알고 있었다.


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 데스크에게 가겠다고 회신했다. 모양새가 수락인 셈이지 사실 약속과 상관없이 가야하는 운명이었다. 오전에 내가 커버하기도 했고 그 현장에 당장 올 수 있는 다른 기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햇빛이 쨍쨍하던 어제 오후 종로구 인근을 터벅터벅 걸으며 취재 계획을 짜고 있는 날 보니 별 수 없는 직업병을 잔뜩 갖고 있다 싶었다. 그렇게 현장에 도착했고 다음 약속을 위해 언제 목적지 가는 버스를 타야하는지 생각치도 않은 채 일을 했었다.


현장 여러곳을 돌다가 문득 결정적인 장면을 얻을 수 있는 폐쇄회로(CC)TV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스쳤다. 관공서나 기업도 아니었기에 부탁만 잘하면 뜻밖의 수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에 현장에서 마주친 관계자에게 슬쩍 물었고 상사와 이야기를 나눈 그 관계자는 CCTV 반출을 허용했다. 현행법상 직접 다운은 어려워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이 모습을 본 직원들은 '유명한 사건인가봐' '포털에 검색해보자' 등 말을 주고 받았다. 내 일을 하고 있지만 순간 느겼던 멋쩍음이란.


취재를 마치고 데스크에게 결과물을 보고했다. 이후 곧바로 기사를 작성해야 했는데 수중엔 노트북이 당연히 없는 상황이었다. 근처 전자기기 매장을 들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다음 스케줄을 고려하면 또 다른 이동은 어려웠다. 별 수 없이 평소 분노의 카톡을 빠르게 주고 받은 내 손가락을 믿기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휴대전화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월하게 작성을 마쳤는데 내용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적어둔 기사가 날라가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앞으로 절대 휴대전화로 기사를 쓰지 않겠다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후회하면 뭐하겠나. 적었던 기사 내용을 복기해가며 다시 작성을 마쳤고 그렇게 마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달리는 버스 창문으로 밖을 보는데 내가 휴무를 보내고 있는 건지 현장을 갔다가 점심 약속을 소화한 건지 순간 헷갈렸다. 솔직하게 휴무를 보내고 있는데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은가.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던 하루였다. 그런데 왜 난 스스로 일을 자처해 하게 됐을까.


일이 힘들어 다른 직군으로의 점프를 최근까지도 수차례 시도한 바 있다. 실제로 이직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이렇게 한눈을 잘 팔았음에도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제처럼 쉬는 날 일을 해도 억울한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글밥을 먹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한눈을 팔 때마다, 또 어제 같은 하루를 보낼 때마다 든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다행인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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