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피두센터의 도서관을 들렀다 집으로 오는 길이였다.
파리 1구의 쇼핑가 거리를 걷다가 아무 생각 없이 H&M 매장에 들어갔다. 쇼핑, 특히나 의류 쇼핑을 즐기는 편이 아닌 성격인 데다 유학생 신분이 되고 보니 가장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옷을 사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그날따라 빨간색으로 크게 적힌 sold(세일) 표시를 보곤 자연스럽게 매장으로 들어갔다.
일 년에 두 번 크게 찾아오는 세일 기간이라 사람들은 발 디딜 틈이 없게 많았고 물건들은 대부분 정신없게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 들을 보자마자 귀찮다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던 찰나, 5 euros(5유로) 표시가 되어있는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그 코너에는 옷이며 가방 양말 액세서리 할 것 없이 정리되지 않고 모두 섞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절대 관심을 주지 않았을 테지만 그날따라 열정에 타올라 살만한 물건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나름 득템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손에 들게 된 것은 블랙 민소매 원피스였다.
면은 얇았고 가슴은 너무 파였으며 길이도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원피스였다. 평소의 내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원피스였지만 한국돈으로 9천 원을 하지 않는 저렴함에 입어보고 별로면 안 입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으로 피팅도 해보지 않고 결제를 했다.
그렇게 짧은 쇼핑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제야 나의 첫 민소매 원피스를 꺼내 입어 보았다. 막상 입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슴골가 팔뚝이 도드라져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평소에 팔뚝 콤플렉스가 있던 나에게는 너무 과감한 스타일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에 이 옷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파리잖아. 뭐 어때? '
그 순간, 그런 마음이 들자 마음이 한순간에 편안해졌다. 그동안 민소매 원피스를 입지 못했던 이유가 남의 시선이 신경 쓰여 내가 나에게 부여했던 콤플렉스들 이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 스스로가 정해놓은 불편한 틀에서 자유로워지자 처음엔 민망하기만 했던 그 원피스가 참 가볍고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추고만 싶었던 팔뚝보다는 목선이 날씬하게 보였고 짧게 느껴졌던 길이는 딱 알맞은 길이였다. 그리고 내심 나는 이런 스타일을 입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에 내가 적응을 해가고 있구나. 이곳은 나와 잘 맞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된 것 같다. 그 후로 작업을 하는 일 취미생활을 즐기는 일 소비를 하는 생활 전반의 모든 일에서 나는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고, 신경 쓰이기만 했던 파리지앵들의 생활들도 그들 각자의 개성이라 여겨지며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잔디밭에 그냥 앉으면 쯔쯔가무시병에 걸린다며 유난을 떨어대던 한국에서의 나는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근처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선선한 바람과 햇볕을 쬐는 행복을 누렸다.
마끼아또를 즐겨마시며 실내생활만 선호했던 나는 멋진 테라스에서 햇살을 쬐며, 사람 구경을 하며, 에스프레소 한잔의 시간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의 5유로짜리 블랙 민소매 원피스와 함께 나의 진정한 파리지엔느 라이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