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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etPaulina Nov 16. 2021

일곱 번의 이민가방

2074일 약 7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내는 동안 대략 7번을 이사를 했다. 비쉬(Vichy)에서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로 마지막엔 파리(Paris)로 지역을 세 번이나 옮겼다고 해도 많은 횟수에 속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난 유학기간 동안 참 지지리도 집복이 없었다.


이사는 누구에게나 피곤한 일이다. 정착하여 나만의 패턴으로 정리해 살아가고 있던 터전을 정리하고 새로운 장소를 알아보고 옮기고, 적응을 해야 하는 아주아주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그곳에서의 나는 '돈 없는 유학생'신분이었다. 하루하루의 상황을 모르기에 이사에 큰돈을 쓸 수 없는 나는 매번 이민가방 가득가득 짐을 넣어 직접 옮기는 가방 이사를 선택해야만 했다. 때로는 SNCF (한국의 코레일과 같은 프랑스 철도청)를 이용하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옮기기도 하고 몇몇은 걸어서 옮겨가며 나는 그렇게 7번의 이사를 했다.


나의 첫 번째 이사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지 이틀 만에 해야 했다.  유학 준비를 도움받았던 유학원을 통해 룸메이트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소개받은 친구가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기숙사 생활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싶어 수락했던 동거였다. 낯선 땅에서 같은 한국인들끼리 같이 살며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비쉬에 도착 후 2일 만에 날벼락으로 돌아왔다. 먼저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요청을 했던 상대방이 막상 살아보니 자신은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며 혼자 살집을 구했으니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미리 상의라도 해주었다면 충격이 덜 했겠지만 날벼락 같이 통보만 하고 훌쩍 떠나버린 룸메이트 덕에 충격을 받을 시간조차 없이 나는 사태 수습을 위해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다행히 어학원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을 구했고, 그곳이 나의 프랑스 첫 번째 보금자리 508호 실이였다.  


몇 개월 후, 저렴한 학비와 괜찮은 어학 커리큘럼을 갖추었고, 내가 지망하는 학교 중 하나가 있는 지역인 스트라스부르그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기차로만 6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의 지역 이동이었으므로 집을 구하는 일도 이사를 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비쉬는 학비가 너무 비쌌고, 너무 시골마을이었다. 조금 더 큰 도시로의 이사를 결정하고 맨몸으로 집을 구하고 어학원을 등록하고 이사를 준비했다. 한국이면 넉살 좋은 아저씨들이 운영하시는 용달이사를 부르면 간단했을 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나마 내 상황에서 가장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라면 SNCF 가방 이사 서비스가 있었다. 한국의 코레일과 같은 프랑스 철도청에서 운영하는 서비스로 무게 상관없이 가방 형태로만 된 짐을 출발지의 대문 앞에서 도착지의 대문 앞까지만 딱 옮겨주는 서비스였다.


"손잡이"만 달려있으면 된다는 약관은 유학생인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계약조건이었다. 가방 개수로 비용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민가방이 터지기 직전까지 짐을 밀어 넣은 채로 서비스를 이용했다. 이사비용을 아낄 요량으로 꽉 꽉 밀어 넣은 짐들은 대문 앞에서 대문 앞까지 옮겨주는 서비스 덕분에 건물 현관에서 내 방까지 옮기는 일에 하루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비용은 아주 많이 아낄 수 있었다. 내 몸집보다 커다란 가방을 낑낑거리며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을 오르고 올라 이사를 마친 첫날은 짐을 푸르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잠들고 말았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비쉬에서의 유학 초기 두려움은 사라진 상태였고, 살아보진 않았지만 소문으로 들어온 복잡함 가득한 파리의 생활보단 한적하고 여유로운 시골 도시였다. 그렇지만 그곳의 짧은 평화도 파리 외곽의 학교로 진학이 결정되고 끝이 났다. 나는 또다시 짐을 꾸렸다.


파리로 이사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스트라스부르그의 레지던스 계약만료일이 되어버렸다. 파리에 거주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 급하게 임시거처를 구해 '임시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또 파리의 임시거처를 구했다. 그렇게 파리에 올라와서 내가 살 집을 구하느라 몇 날 며칠을 집을 보러 돌아다녀야 했다. 시골에 비해 파리는 집도 많았지만 내 집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구하는 조건도 많았으며, 집세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되게 고가였다. 나의 조건에 맞는 집을 찾기 위해 매일 건물 꼭대기 쪽방부터 하녀 방까지 가리지 않고 집을 알아보러 다녀야 했다.


내 수준에 맞는 집들은 보통 파리에서 "여자 혼자 살기 위험한 지역"이라고 불려지는 곳들 뿐이었다. 그러던 중 찾게 된 것이 '마리암'이라는 정말 예쁜 흑인 아주머니의 집이었다. 파리 중심가에서는 살짝 외곽이었지만 안전한 주택가였고, 5살 꼬마 다비드와 마리암 아주머니 이렇게 함께 생활하게 된 집이었다. 짧은 불어 탓에 살갑게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았지만, 아침마다 마이클 잭슨 춤을 추는 다비드의 모습과 미모와 함께 쿨내 풍기는 마리암 아주머니와 나름 꽤 괜찮은 조합의 생활이었다. 나의 방은 넓었고, 학교와 거리도 가까웠으며, 내가 낼 수 있는 아주 적당한 집세의 집이었다.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지내온 1년 6개월의 시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마리암과 다비드가 야반도주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동안 사이좋게 지내왔던 나의 집주인 마리암은 사실 전남편의 집에 살고 있던 세입자였고, 상황이 달라졌는지 어느 순간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본인이 진짜 집주인이라며 집을 팔 계획이니 이 집을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다비드의 친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햬졌던 기억뿐이다.


다행히 두 달 정도의 시간 여유를 주었고, 나는 맞는 가격대의 파리 유학 2세대쯤 돼 보이는 한국인 아주머니가 집주인으로 있는 집의 방한칸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그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야반도주를 한 마리암이 그리워지게 만드시는 곳이었다. 방한칸에 두 명이 함께 지내야 했지만 그전보다 많은 집세를 내야 했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고작 내방과 욕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주방뿐이었다. 하물며 가끔 본인 집에 손님이 오실 때면 잠시 며칠 다른 곳에 지내다 오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분이셨다.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졌지만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던 마리암이 그리워지는 곳일 수밖에 없었다.

 

유학생활의 끝자락이었기에 그냥 참고 살아보자 싶었지만 유학의 마무리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또 한 번의 이사를 결심했다.


나와는 달리 유학 생활 동안   번의 이사도 하지 않았던 집운이 좋은 남자 친구의 도움으로 정말 괜찮은 동네에 괜찮은 구조의 괜찮은 가격까지 갖춘 집을 구할  있었고, 다행히도 그곳이 나의 마지막 집이 되어 유학의 마무리를 지을  있었다.

흔히 말하는 프랑스풍 구조의 집이었기에 파리 감성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유학 막바지에 딸이 공부했던 나라를 보겠다며 오셨던 부모님과 다 같이 지내기에도 괜찮았던 곳이었다. 엄마 아빠가 본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파리의 보금자리가 그곳이라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귀국 한 달 전에 하수구 역류 사건이 일어나 온 집안이 침수되는 사건이 벌어져 절반 이상의 짐들을 버리고 그동안 작업했던 작품들의 대부분을 버려야만 했던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진 곳이기도 했지만, 유학생활 통틀어 가장 자유롭고 따뜻했으며, 낭만 가득하게 지냈던 나의 집이었다.


내 평생의 이사와 사건사고는 프랑스에서 다 겪고 가는구나 싶은 7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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