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뛰어 올라타자마자 전철 문이 닫히고 출발했다. 평일 오후 1호선의 1번 칸은 승객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날씨가 더워진 탓에 한바탕 달리기를 한 온 몸엔 금방 열이 올라와 송글송글 맺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살살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에 더위를 식혔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것이 잠에 들어버렸다. 꾀 오래 잠든 기분으로 정신이 들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승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깨워
피곤한 것 같은데... 난 괜찮아.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 눈을 감고 있었고, 고꾸라진 내 고개가 전철의 흔들거림에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마에 온기가 느껴졌다. 내 이마는 옆에 앉은 승객의 어깨를 베개 삼고 있었다. 아뿔싸. 잠은 줄행랑을 쳤지만 눈을 뜰 수없었다. 방금 내 얘기를 한 게 분명한 데, 지금 고개를 드는 건 어색해 보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기대고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침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을 들으니 뛰쳐나가기엔 목적지와 너무 먼 역이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이 짧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 난감함을 하늘이 아셨는지 전철이 크게 흔들렸고, 자연스럽게 그분의 어깨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마주칠까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곧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지만, 두 분은 내리지 않았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아직 옆자리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하듯 문이 열려 있는 동안 팽팽한 침묵이 객실에 가득했다.
옆자리 아주머니들께서는 전철이 출발한 후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에 대한 얘기였다. 이야기는 내가 잠들었을 때부터 시작된 듯했다. 두 분의 대화 내용을 다 이해하긴 어려웠다. 이미 한창 진행된 드라마를 이제서야 처음 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두 분의 사적인 언어로 주고받는 대화는 버퍼링 걸린 동영상처럼 부자연스럽게 뚝 뚝 끊기며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분 탓인지- 두 분이 날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셔츠를 입고 있던 내 모습에서 자기 아들의 모습을 보셨던 것일까? 요즘 학생들이 많이 힘들다, 피곤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어깨의 주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날 보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두 분은 몇 정거장 후에 내리셨다. 그제야 난 슬며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눈을 뜨고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할 걸 그랬나. 후회는 항상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슬며시 찾아와 얄밉게 귓속말을 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뒤통수가 찝찝했다. 하지만 이마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잠시 쉬어가도록 불쾌함 없이 허락해주었던 그 어깨는 정말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