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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Sep 21. 2017

하얀 우유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그때는 모든 것이 소박했다. 주머니에 오백 원만 있어도 부자가 된 기분으로 하루를 살 수 있었다. 난 우리 반에서 제일 일등으로 우유를 먹고 싶어서 우유 당번을 자처했었다. 부모가 우유를 신청했지만, 그것을 마시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다. 난 우유 당번의 특권(?)으로 그들이 남긴 우유를 -선생님 몰래-챙겼다. 학교 뒤편엔 건물이 만든 그늘에 앉아 뽑기(달고나) 장사를 하시는 아저씨가 계셨고 그 아저씨는 우유 한 개 당 300원짜리 큰 뽑기 하나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난 뽑기를 거저먹고 친구들은 우유를 안 먹었다고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날 일이 없으니 윈윈(win-win)이라 생각했다. 십 년도 더 지난 후에야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우유를 받아 어딘가에 팔다가 학교에 들통나서 그 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된 것을 알았다. 뽑기 아저씨는 나뿐만 아니라 각 반의 우유 당번들을 매수했던 것이다. 대단한 배짱을 지닌 장사치가 아닐 수 없었다.


 우유는 1~2교시가 끝나고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짝꿍이었던 한 친구는 그 우유를 가방 안쪽에 밀어 넣었다가 점심시간에 슬며시 꺼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외모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감지 않은 듯한 까치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한눈에 봐도 허름한 반팔 티셔츠와 아마도 하얀색이었을 실밥 뜯어진 운동화까지. 지금의 ‘왕따'와는 분명 달랐지만, 당시 그 친구와 어울려 노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걸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던 터라 그 친구와 짝꿍이 된 것이 불만스럽지 않았다. 그 친구 때문에 나 역시 선생님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된 것까지 말이다.


 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밥을 안 먹고 놀다가 선생님한테 혼나고 ‘붙잡혀’ 밥을 먹는 일이 잦았다. 아니면 아예 1 등으로 밥을 먹고 교실을 뛰쳐나가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이 내 것인 양 즐거워했었다. 우리는 복도에서 배식을 받아 자기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내 짝꿍은 항상 꼴찌로 배식을 받았었다. 먹는 속도도 느린 탓에 어떤 날은 점심시간을 다 놀고 교실로 들어올 때 식판을 치우는 짝꿍과 마주치기도 했었다.

 점심을 재끼고 학교 뒤 공터에서 팽이를 돌리다가 선생님께 붙잡혀 교실로 끌려왔던 어느 날, 난 처음으로 짝꿍 뒤에 서서 배식을 받았다. 다 식은 밥과 반찬을 투덜거리며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얼른 먹어 치우고 나갈 심산으로 수저를 든 순간, 짝꿍은 아침에 받은 우유를 뜯어 흰쌀밥에 들이 붇기 시작했다.


으악! 뭐 하는 거야!!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내 소리에 더 놀란 짝꿍은 움찔거리다가 남은 우유를 제 옷에 쏟아버렸다. 그런 우리를 보고 가장 놀란 사람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

얘가 밥에 우유를 부어요!


 당혹스럽고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짝꿍과 짝꿍의 식판을 번갈아 보셨던 선생님의 얼굴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나더러 얼른 앉아서 밥 먹으라고 하시면서 조심스럽게 짝꿍에게 다가가 물으셨다.


왜 우유를 밥에 부었니?

아.. 저.. 이렇게 먹으면 마… 맛있어요..


 선생님은 그렇구나라고 대답하셨지만, 그 말엔 어떤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선생님이 자리로 돌아가 앉자 방금 몇 초간 일어났던 일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사실 며칠 전 크림 리조또를 먹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날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짝꿍은 그 뒤로도 계속 밥에 우유를 말아먹었고, 선생님은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그런 짝꿍과 더 어울리고 싶어 하질 않았다.

 크림 리조또. 그 친구는 그 어린 나이에 이 맛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황했던 그 날의 선생님도, 짝꿍을 핑계로 비위가 상해서 밥을 못 먹겠다며 식판을 치우고 팽이를 돌렸던 나도 참 어렸던 것 같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짝꿍의 우유에 만 밥을 이제 와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에 다시 그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땐 정말 미안했다고, 네 우유 밥은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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