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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l 13. 2022

묵상_"한 몸이 된다는 것"(고전 12:13-27)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성도는 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바울 사도는 '몸'과 '지체'를 구별하여 설명을 이어가고 있고, 이 구별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각 지체와 한 몸의 조화는 그만큼 중요하면서 섬세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비유를 현대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발이야. 나는 손이 아니야. 나는 온전히 발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어(15절)", "나는 귀야. 나는 눈으로 살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귀일 때 가장 나답거든(16절)."

 물론 이 말 자체에 문제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를 무엇이라 주장하고 믿든지 그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면, 그의 몸에 붙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즉, 귀로써 한 몸에 속해 있고, 발로써 한 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의 말은 그가 몸에 붙어있지 않으면, 더 이상 발일 수 없고 귀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속 철학은 우리의 개성을 중요시한다. 각 개인의 독창성과 개별성을 경배한다. "나 답게 사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인 양 설교한다. 수많은 미디어와 예술 작품들의 기저에 이 철학이 담겨 있고 시대의 진리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이는 절벽을 향해 달려드는 귀신 들린 돼지떼와 다르지 않다.

 개성을 향한 경배는 이 시대의 모든 공동체를 파괴했다. 교회와 가정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회사 생활, 학교 생활 및 사회 활동까지 그 파괴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개성은 '한 몸' 안에서, 연합 속에서만 온전하고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이 이런 시대를 향해 외치는 말은 명백히 "너의 개성으로 공동체를 죽일 수 없다. 그런 시도는 너 자신을 죽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분명 개인의 고유함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의 한 면을 장식할 때에만 아름답다.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때 보다 타락하고 망가지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한 몸에 여러 지체를 두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 건 일반적인 유형의 조합을 만나게 된다. 주도적인 사람, 순종적인 사람,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강하고 도전적인 사람, 세심하고 신중한 사람 등. 이런 조화가 그 집단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양함에 대한 선호는 예술분야에서 특히 중요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만 그 가치를 지닌다. 카테고리를 이탈하는 순간 다양성은 추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개성의 숭배는 공동체를 파괴함으로 스스로를 훼손한다.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이처럼 다양한 지체를 한 몸 안에 두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다른 지체의 가치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두시길 기뻐하실까? 이에 대해 우리가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대답이 가장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본주의적 해석에 가까운 것 같다.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표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했는가? 성육신의 낮아짐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멀끔하고 늠름한 모습이 아니라 상처투성이로 벌거벗긴 채 나무에 달린 앙상한 몸인 것이다.

    세상의 공동체도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하나 됨은 너무 쉽게 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연합,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연합은 그렇지 않다. 느껴지는 감각이나 겉으로 표현되는 모습은 닮아 있어도 이 연합과 그 연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뭐가 얼마나 다르기에 이토록 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도의 연합은 십자가를 지는 연합이다. 이 연합은 십자가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 세 못에 의지하여 매달린 육체로 거할 때에 말이다.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덜 귀히 여기거나 아름답지 못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모든 지체를 '한 몸'으로 여기며 "귀중함을 더하"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행위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한 몸에 속한 한 지체로 그리스도인은 "서로 같이 돌보"아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성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역설이다.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다. 전부를 잃어야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죄와 저주의 벌인 십자가만이 복과 생명의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안에서 개성을 죽인 자 곧, 십자가를 진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 그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개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나의 개성을 주창하고 변호해야만 했다면, 이제는 공동체가 나의 개성을 변호해준다(히 12:1). 미인의 얼굴이 아름다움은 머리칼과 얼굴형, 이목구비의 아름다운 조화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 하나가 조화에서 벗어나서 더 뛰어나고자 한다면, 그 얼굴 전체는 미(美)를 잃고 말 것이다.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므로 바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곧 교회는 함께 웃고 함께 웃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희박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 증거 중의 하나가 교회에서 '권징'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정죄와 권징의 차이가 무엇일까? 둘 다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어 회개를 강권하는 것은 똑같다. 그때 정죄는 나와 그를 분리한다. 그러나 권징은 그 형제의 문제를 함께 짊어진다. 그 형제와 함께 하나님께 회개 기도하며 애통해한다. 고난을 함께, 적극적으로 감당한다. 오네시모를 위해 편지를 쓴 바울,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긴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좋은 본이다.


    이제 세상과 교회의 하나 됨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리고 만일 당신의 공동체에서 그 차이를 선명히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십자가를 지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라. 공동체의 누구도 당신의 희생을 몰라주고, 고마워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당신을 비방하고 멸시하더라도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그렇다면, 당신을 통해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육체(교회)를 죽음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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