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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Sep 22. 2021

나는 없고 당신만 있나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 요한복음 3장 강해 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와 “나”가 차지하는 상대적 위치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상황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인격적인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보다 신앙의 명제나 자기 행동을 신뢰할 위험이 늘 있습니다.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도 그는 흥해야 하고 우리는 쇠해야 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 일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을수록, 여러분의 삶과 경험에서 그는 점점 더 흥하시고 여러분은 점점 더 쇠하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신약성경 전체 가르침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 명제입니다.

 요한이 여기에서 실제로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자아가 쇠하지 않고 처리되지 않으면 그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료가 있어도 그릇이 차 있으면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빈 그릇에만 음료를 채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쇠하지 않으면 그가 흥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큰 원수는 ‘자아’입니다. 물론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마귀, 사탄, “이 세상의 신”(고후 4:4)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보다 우리의 자아를 통해 일합니다. 뱀은 자아에 호소했습니다. 교만에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원죄로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틀어 가장 큰 장애물 역할을 해왔습니다.

 신약성경은 계속해서 이에 대해 가르칩니다. 로마서 12:3에는 사도 바울의 아주 훌륭한 진술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3절을 보십시오! 자기 기만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바로 보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은 “율법의 일”이라고 부르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상을 정확히 드러내고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작용하면 자기 실상을 알게 됩니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해 갈 3:19, 롬 7:9 그리고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려면 이 모든 율법의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회개가 첫 자리에 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도 율법의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계속 인식해야 하고, 최선의 행동조차 누추하다는 것을 계속 인식해야 합니다. 율법보다 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실상과 마음의 어둠과 무가치함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면서 계속 쇠해야 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안다고(롬 7:18)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로 보는 자는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아주 교묘한 측면이 있습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의로워진다는 말이 정말 맞아”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교활하게 끼어들어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여러분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났습니까? 점점 더 벗어나고 있습니까? 늘 자기 자신과 자기 문제만 이야기하지는 않습니까? 자기가 한 말, 자기가 한 일, 자기가 바라는 것, 자기가 겪은 일, 자기 앞에 있는 어려움, 자기 문제만 늘어놓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자아가 전면에 있고 예수는 저 뒤 어딘가 가려져 있다는 표시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요! 자아가 쇠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에 자신에 대한 관심이 그토록 큰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해치는 독약이요 저주입니다.


 자기중심성은 심지어 구원조차 자신이 얻을 혜택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첫째 가는 관심사는 자기 영혼의 구원이며, 그것은 옳은 태도입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계속 그 상태에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유년기에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러면 안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합니다. 누르고 없애야 합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자기중심적이 되면, 자신과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난 이런저런 것을 얻었다. 난 이런저런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그 모든 것을 채워주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전부입니다! 구원은 오직 나를 위한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구원이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는 복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느냐 아니냐, 그가 흥하시고 우리는 쇠하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 내가 받은 것, 내가 될 모습이라는 관점에서 하는 말은 점점 줄어들고 훌륭한 객관적 관점에서 하는 말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날 위해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해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로 오신 분입니다. 자아가 쇠하면 창세전부터 영원토록 인간의 상태와 상황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떠올릴 수 없는 구원의 큰 계획과 그 시행과 그에 수반된 모든 일을 보게 됩니다. 오, 이것이 자아가 쇠하고 주님이 흥하실 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가 주신 구원, 우리가 참여하게 된 구원의 위대함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보다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구원 ‘그 자체’에 감격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도 충만함을 얻고자 애쓰며 기도해 왔어요. 추구하고 탐색하며 책도 읽고 집회도 참석했다고요”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그 중심에 자아가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저것 구하기만 한다는 사실, 모든 말이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자신에게서 끝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흥하기 시작하면 그런 기도는 점점 줄어들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흠모하는 기도가 늘어납니다.


 자아가 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태도가 점점 줄어듭니다. 자아는 항상 예민합니다. 누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상처 주거나 공격하지 않는지, 숨은 의도를 가지고 대하지는 않는지 늘 살핍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항상 두려워하고 감시하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합니다. 이것이 자아의 큰 특징입니다. 우리는 늘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은 자아가 여전히 중심에 있다는 표시이며, 자아가 맨 앞에 있고 예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와 얼마나 달랐는지 모릅니다! 이 위대한 사람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고전 4:1-4).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갈 2:20)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자아가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것이고, 그토록 예민하게 자신을 보호하며 방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겐 복된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자신과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고요한 마음, 평안한 마음, 비참한 자아 주변을 영원히 맴돌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 의존성도 줄어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기에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짭니다. 자기 힘을 의지합니다. 이른바 ‘기도의 뒷받침’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자기 혼자 계획과 방안을 다 세워 놓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놓습니다. 자기가 거의 다 할 작정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해 ‘맡기는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자아가 앞에 있는 태도, 자아를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는 저 뒤편 어딘가에서 약간의 도움과 원조만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 얼마나 비극적인 상태입니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태도이자 심한 무지의 소산입니다.

 다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봅시다. 그는 자아가 쇠하다 못해 사실상 사라져 버렸습니다(고후 2:14-16).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고후 3:5, 골 1:28-29).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빌 4:13).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점을 아주 잘 표현한 테오도르 모노(Theodore Monod)의 찬송을 인용하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

오, 그 시절 생각하면

얼마나 슬프고 부끄러운지,

구주가 긍휼로 구하신 간구가 헛되게도

나 당당히 대답했네.

“나만 있고 당신은 없나이다!”


그런데 그가 날 찾으셨네.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피 흘리시는 그 모습 보고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기도하시는 그 소리 들었네.

나 수심에 잠겨 힘없이 말했네.

“나도 있고 당신도 있나이다!”


그의 온유한 자비 날마다

날 고치시고 도우셨네. 충만하고 자유롭게,

부드럽고 강하게, 아, 그토록 오래 참으시며

날 낮추셨네. 마침내 나 이렇게 속삭일 때까지,

“나는 작아지고 당신은 커지시길!”


가장 높은 하늘보다 더 높고

가장 깊은 바다보다 더 깊은

주의 사랑 마침내 날 정복했으니,

주여, 제 간구를 들으소서.

“나는 없고 당신만 있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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