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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Sep 12. 2021

어둠과 빛

마틴 로이드 존스 - 요한복음 3장 강해 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19-21)


 요한복음 1장 16절에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에 우리가 던질 중대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의 은혜를 더 알아 가지 못하는 걸까요?”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은 지속적인 과정이요 확장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이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가?”라는 이 질문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핵심 문제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만 알아도 대부분의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에서 그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교통 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그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맞닥뜨리는 우리의 문제를 보면 우리가 ‘충만함’이라는 주제에 접근할 때 어떻게 그처럼 쉽게 자신을 속이고 마귀에게 속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천성적으로 어둠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핵심적인 본질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나쁜 짓을 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나쁜 짓도 포함되지만, 우리의 실제 문제는 계속 나쁜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이 욕망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요? 그 대답은 오직 하나, 어둠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것은 단순히 어둠 안에서 살고 어둠의 특징이 나타나는 짓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으로 돌이키지 않을 만큼 어둠을 사랑하고 좋아하며 흐뭇해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무서운 힘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지배하고 압제합니다(엡 2:1-2). 탐심과 욕망과 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속에서 활동합니다.

 우리가 첫째로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이처럼 악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할 짓을 계속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가진 문제의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의 충만한 데서 받길 원한다. 다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던질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그의 충만함을 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충만함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로 깨달아야 할 사실은 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 방어’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는 대신 빛에 대한 말만 합니다. 빛을 원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며, 정말 빛을 원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정작 빛으로 오지는 않음으로써 사실은 원치 않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일에 능숙한 전문가요 사기꾼이요 위선자들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렇게 속여 넘깁니다.

 자기를 방어하는 또 다른 방법은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매번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때는 잘못임을 알아차립니다. 금세 알아차리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그때는 그럴 만한 특별한 상황이 있어서..”라고 둘러댑니다. 항상 이유를 찾아냅니다. 매번 변명거리를 찾아냅니다(롬 2:15). “난 빛으로 나아갈(회개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그러니까 왜냐하면 이건 죄가 아니거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니까.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또 있습니다. 이 때문에 허다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충만함을 거의 모른 채 산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 방법은 과거의 결단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저를 찾아와 죄를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를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초지종을 밝히며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죄를 덮어 주신 걸 알지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정말 아는 것 같지 않은데요.” 그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치료법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 하다 평강 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허다한 사람이 이렇게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18절입니다. (이 말씀을)“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럼 됐습니다. 이제 당신은 정죄받지 않습니다. 당신은 안전합니다”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그 말에 의존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결단하고 받아들이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결단은 가치가 없습니다.


 자기 방어의 또 다른 방법은 당연히 마음 불편한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 오,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성경 공부를 잘못하는 경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기 힘들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성경까지 방어막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할까요?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만 읽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용 본문 읽기나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 본문 읽기는 좋아해도 실제로 성경을 일지는 않는 것입니다. 빛이 자기 속을 비추지 못하게 막는 데 성경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로서, 이것만 보아도 사탄의 교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는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고 읽는다면, 성령이 성경을 사용하여 여러분의 지각과 마음을 열어 주시고 양심을 드러내 주시길 기도하지 않고 읽는다면, 아무런 준비 없이 읽는다면, 정해진 분량만 채우고 출근 기차를 타기 위해 후다닥 뛰어나간다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만 생길 뿐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빛이 자기 마음을 조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성장하지 않으며 충만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의무는 잘 지킵니다. 아주 독실합니다. 훈련을 거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를테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양심을 통해 찾아오는 빛의 고소를 차단합니다.



불행히도 우리 모두 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말한 것들은 다 제가 자주 했던 짓입니다. 저는 제가 했던 짓과 여러분이 했던 짓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더 악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다 똑같이 악합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어둠을 사랑하는 위선자들입니다. 말로는 빛을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빛을 원할까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주님이 아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 51:6)


첫 번째로 할 일은 정직한 의도를 갖는 것입니다. 정말 원하지 않으면서 원한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빛은 모든 것을 폭로합니다. 어둠 속에 숨은 모든 것을 환히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삶 전체를 조사하시고 다스리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하나도 남겨 두면 안 됩니다(히 4:13).

 세례 요한과 헤롯 왕의 이야기에서 그 중대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막 6:20).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흠정역)”했습니다. 가책을 받고 바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강력하게 촉구한 한 가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헤로디아를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버려도 한 가지를 남기면 소용이 없습니다. 헤롯이 사랑한 한 가지, 집착한 한 가지는 헤로디아였습니다.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력하게 만드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어느 지점까지는 포기하되, 삶의 특별한 한 가지, ‘아끼는 죄’는 남겨둡니다. 그러면 소용이 없습니다. 전부 포기해야 합니다. 온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을 점검하고 이 복된 빛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의미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그에게서 받으면 되고 그의 충만하신 데서 취하면 됩니다. 그 빛을 바라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받을 때와 똑같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장대에 달린 놋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모든 측면에서 그렇듯이, 충만함의 측면에서도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빛은 이미 왔습니다!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영적으로 빈곤한 것입니까? 방어막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한 가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빛에 굴복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서 그의 처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해지길 원치 않습니다. 불행해지길 원치 않습니다. 무엇이든 양심을 흔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 어리석은 자여! 그는 빛 가운데 서야 할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 그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고후 5:10). 그의 충만함을 받는 일보다 더 집착했던 어둠에 감추어진 일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다 나타날 것입니다. 혹 구원을 받는다 해도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13:15) 같을 것입니다. 간신히, 겨우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권면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다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다 어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빛을 미워하게 만들고 빛으로 오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점을 깨달읍시다. 지금 여기 살아 있는 동안 빛 안에 거하여 우리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로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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