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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Mar 24. 2023

#27.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3-38

[33절]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자료에 따르면, 십자가는 길가나 광장 같은 공공장소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질 장소도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곳은 골고다였습니다. ‘해골’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 죽음 뒤에 다 썩어서 남은 것이 없는 이름, 한편으로는 에스겔의 환상도 생각하게 되네요.

 예수님은 행악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김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환대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가 이제는 백성들의 조롱과 저주를 받으며 예루살렘을 나오셨습니다. 이 추락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요. 기대했기에 더욱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았던 자신들이 옳았다고 의기양양해서 더욱 악독하게 구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동정하는 자들도, 예수의 제자들도 있었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있었든지 간에 그들도 모두 “해골이라 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그들도 모두 죽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죽음 한가운데 서 있는 자들 중에 가장 높임을 받으십니다. 그들 모두의 죄, 죽음을 짊어지신 대표로서 높이 들리셨습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의 첫 선포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용서를 구하는 중보였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모든 이들, 자신에게 죄를 짊어지게 한 모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오 주여..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비웃고 희롱하고 멸시하면서도, 우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죄악에 비해 너무나 옹졸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먼저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당신께 죄를 짓는 그 순간 당신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아버지께 간구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이토록 성실하고 철저하게 순종하십니다.

 저도 예수님을 닮고 싶어요. 저도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원수들,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의롭다고 말하는 저 원수들을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구절에서 늘 말문이 막힙니다. 은혜를 모르는.. 이 악한 종을 용서하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35-37절]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네가 만일”이라고 말하는 게 딱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입니다. 십자가를 대면해 선 자들은 하나 같이 사탄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 예수님은 그런 자를 사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면 ~하라”라고 자기의 생각과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말하는 모든 입술에는 뱀의 혀가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말한다는 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탄이 있는지 모릅니다. SNS와 강단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설교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 예수를 비웃고 희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의에 취해 “만일 예수님이라면 ~하시다”라고 말합니다.

 러틀리지의 지적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그리스도’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탄을 자처합니다.

 아.. 주여, 조금도, 조금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이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여전히 여기는 골고다, 해골이라 불리는 죽음의 땅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세상을 좋게 바꾸는 것이 자기 소명이라고 설쳐대던 오만한 자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주여, 여전히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 죄 없으신 당신께서 어찌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교회에 많은 성도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자가를 구경합니다. 십자가는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연일 뿐, 그들은 그저 구경하고 감상합니다. 영화를 보듯, 미술품을 보듯 감상에 젖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자위합니다.

 예배는 더 이상 service가 아니라 event가 되어버렸습니다. service 할 종이 없습니다. event에 참여할 주인공들만 넘쳐나고, 혹은 주님과 같이 event를 누리고자 하는 오만한 자들 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성전 문을 닫으시고,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려버리신 하나님께서 어찌 오늘날 교회를 이렇게 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주님의 한량없는 자비라고 밖에..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벧후 3:9).

 그러나 누가의 두 번째 성경에서 구경하거나 도망쳤던 자들이 성령을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시작한 것을 봅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옵소서. 부흥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더 이상 십자가를 구경만 하는 자로 남지 않게 하소서. 자기 의와 주를 믿는 믿음을 혼동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켜 주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아버지여,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행한 수많은 악행을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하시고,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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