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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Feb 04. 2017

지하철에서 만난 치매 할아버지

 어느 토요일 밤 9시의 지하철. 옆 칸과 이어진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아주머니가 조급한 걸음으로 넘어오셨다. 상기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걸음을 옮기다가 탄식과 같은 큰 신음 소리를 뱉으셨다. 그 탄식에 뒤섞인 격양된 목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음악을 끄고 시선을 돌렸다. 열차 안 모든 승객들의 시선이 향한 곳엔 아주머니에게 왼손이 꼭 붙들린 한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아주머니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셨다.


 찾았어! 내가 찾았어! 여기 창동역이야. 응. 몰라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건지.. 일단 내릴게. 내려서 다시 연락할게. 응응. 형님께도 말씀드려, 찾았다고. 


 전화 내용은 열차 구석에 서 있던 나에게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치매를 앓고 계신 할아버지께서 홀연히 집을 나가셨고 온 가족이 그 할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통화 내내 아주머니에게 왼손을 내준 채 너털웃음을 짓고 계신 할아버지의 표정은 아이처럼 밝아 보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아주머니의 얼굴엔 많은 감정이 뒤섞여 거의 울먹이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기까지 아주머니는 할아버지께 꾸지람을 늘어놓으셨다.


혼자 밖에 나가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허허.

애아빠랑 저랑 지금 다들 아버님 찾느라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허허.

… 전철은 또 어떻게 타셨어요?

허허.

이제 다음 역에 같이 내려요. 내려서 집에 가는 거예요. 네?

허허.


 티 없이 해맑은 할아버지의 미소가 아주머니의 복잡한 심정을 다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가쁘던 아주머니의 호흡이 진정되면서 음성도 낮아지셨다. 다시 두 분을 주목해 보았다. 동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의 아주머니와 그 옆에 앉은 왜소한 체구의 할아버지. 둘의 체격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힘없는 웃음 때문인지 할아버지가 더 왜소하고 고독해 보였다.

 저분은 젊은 시절, 사랑과 가족을 위해 거칠고 험한 인생을 지나온 위대한 인물 중 한 분이셨을 것이다. 바로 아버지, 한 집의 가장 말이다. 강인함 또는 명철함 같은 무기들을 지니고 용감하게 인생길을 걸어왔으리라. 아직 그 여정의 서막을 걷고 있는 나로선 미약하게나마 예측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어깨는 움츠려졌다. 두 팔은 힘을 잃은 채 가까스로 몸통에 붙어 있었다. 등은 굽어 고개가 앞으로 쏟아질 듯했다. 너털웃음은 어쩌면 신음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기침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방학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아주머니는 할아버지의 왼손을 꼭 잡은 채 열차에서 내리셨다. 출구 쪽을 향해 걸으시며 내 앞을 지나갈 때 아주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할아버지의 양 손을 보았다. 자신을 붙잡은 그 손을 양손으로 따뜻하게 포개 잡고 여전한 미소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시며 끌려가듯 걸음을 옮기셨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할아버지에겐 돌아갈 집이 있었다. 애타게 자신을 찾던 가족들이 있었다. 친어머니처럼 투털 대기도 하고 손을 꼭 잡아주기도 하는 며느리가 있다. 치매에 걸렸지만, 온 가족이 신경 써야 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기꺼이 함께 사는 가족이 있다. 노부모를 요양원에 위탁하는 걸 불효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구태여 같은 식탁에서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겠다는 식구가 있었다.


 ‘학생'이라 불리던 나는 어느새 ‘총각’이 되었다. 가끔 듣고 있는 ‘아저씨’ 소리도 머지않아 자주 불리게 될 것이다. 언젠가 ‘아빠’가 될 것이고 그건 또 ‘아버지’로 바뀔 수도 있다. 그 후엔 나도 ‘할아버지’가 되겠지. 그때 내게도 내 손을 꼭 붙잡아 줄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 투정 부리고 짜증을 내면서도 붙잡은 손을 쓰다듬어주는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누구도 책임질 수없게 될 때, 날 책임지겠다고 기꺼이 나서 주는 식구들이 있다면, 나도 너털웃음을, 가장 행복한 그 웃음을 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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