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다녀왔습니다."
어제 점심 무렵, 어머니와 저는 시청역에 갔습니다. 어머니의 지인이 점심 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청계천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과 헤어지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경복궁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뜬금없는 경복궁 방문 목적은, 저의 심리학 공부를 위해서였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심리학 개론은 얕지만 상당히 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었고,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 중심의 정보가 많아 그렇잖아도 암기를 싫어하는 저에게 부담이 컸습니다.
그러다가 흔히 활용되는 암기 기법 중, '기억 궁전'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기억술은, 내가 실제 익숙한 물리적(또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고, 적당한 장소마다 암기할 개념이나 키워드 등을 배치해서, 필요시 그 위치를 찾아서 기억된 내용을 인출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실제로 암기왕 대회 등의 출전자들도 많이 사용하는 효과가 검증된 기억술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심리학 개론을 품을 수 있으면서도, 나중에 관련 지식과 정보가 축적 및 확장되어도 활용 가능한,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를 생각하다가 문득, 경복궁을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궁전'이라는 문자 뜻 그대로와 어울리면서도, 심리학 개념들을 경복궁의 여러 건물 구석구석에 거의 무한정 매칭시킬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제로 어제 현장을 답사했는데, 마치 요즘 제 감수성이 올라가 있는 상태였는 데다가, 기억 궁전을 상정하고 봐서였는지, 경복궁의 의미와 미적 완성도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보통 광화문, 흥례문, 그리고 근정문을 차례로 지나고 나면, 경복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에 자리 잡은 근정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근정전의 '부지런할 근', '정사(정치) 정', '집 전'이란 한자 뜻으로 풀이하면 대략 '정사에 힘쓰는 큰 집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정전은 흥선 대원군이 조선 후기에 경복궁을 재건하고 실사용되었던 당시, 왕과 신하들의 경연과 토론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건물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기능 및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새삼 이 건물을 바라보면서, 훌륭한 비례, 적절한 곡선과 직선의 사용, 소박하면서 너무 화려하지도 않지만 조화로운 느낌을 주는 단청, 그리고 압도적인 크기(아마 경회루와 비슷하거나 더 클 겁니다)의 건물이 주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혼자 감상하던 중에, 어머니의 설명도 들었는데, 근정전 앞마당(?)을 잘 보면, 약간 바깥쪽으로 경사져 있다는 것입니다(마치 욕실 바닥 타일이 그렇듯이). 혹시나 해서 모퉁이 쪽에 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당시에 만들었을 돌로 된 하수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비가 웬만큼 와도 왕이나 신하들의 신발이 푹 젖는 일은 없었을 듯합니다.
근정전에서 뒤로 돌아 북쪽으로 이동하면 바로 임금님의 집무실에 해당하는 사정전이 있고, 다시 문 하나를 더 지나면 드디어 강녕전(왕의 침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기서부터는 그야말로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강녕전의 한자 풀이를 찾아보면, '건강 강', '안녕 녕', '집 전'이란 한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왕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왕의 휴식 공간입니다. 내부를 들여다보고 재미있었던 점은, 중앙에 넓은 왕의 침실이 있고, 그 좌우로 호위무사들이 머물면서 불침번을 섰을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잘 때 경호원들이 지키는 것이 연상되어 흥미로웠습니다. 강녕전 호위무사의 공간에는 침실은 없었고 대신 밤을 새우면서 책을 읽거나 하는 등 간단한 활동을 하며 대기하도록(졸음을 참을 수 있도록) 작은 책상도 있었습니다. 잠자는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완전히 편하기 어려운, 왕이란 무게를 짊어지고 살았어야 했으리라는 지식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
경복궁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향원정에 도착해서, '와 예쁘다' 하고 속으로 감탄하다 자세히 보니, 백로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향원정과 (북쪽으로 접한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와 함께, 백로, 버드나무, 소나무, 연잎 등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는 낙원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어제는 건청궁에 들어가는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는데, 언젠가 개방한다면 경복궁 안의 또 다른 작은 궁전이라는 이곳도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경회루는 아마도 경복궁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면서, 향원정과 함께 아름답기로 유명한 장소입니다.
향원정에서 남쪽을 향하면 경복궁에서 가장 넓은 일종의 대로를 통해 걷게 되고, 경회루 뒤편에 이르면 문이 세 개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경회루에 출입하던 왕, 신하 등 국내외 빈객, 그리고 연주가들이나 음식을 나르던 궁녀들도 이 세 개의 문 중 정해진 곳으로 들고 났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경회루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경치가 기가 막히다 들었지만, 예약을 해야만 볼 수 있다는 말에 조금 실망했습니다.
경회루 동쪽 큰길을 따라 조금만 이동하면, 경회루 남쪽에 이르고, 호수 위에 서 있는 멋진 경회루의 옆면이 보입니다.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경회루는,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두 개의 구조도 기지고 있었습니다. 2층에서 귀빈들이 여유롭게 담소를 나눌 때, 분주하게 주안상을 위로 올리고 연주가와 무용수들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야간에 조명이 켜 있는 경회루를 봏 기회가 한 번 있었는데, 바람이 없어 잔잔한 호수에 반사된 뒤집힌 모양의 물그림자는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경회루 입장 관람과 야간관람도 해 보면 좋겠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경복궁을 관람하고 광화문을 통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니(<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올랐음), 발바닥이 찡찡 울리고 힘이 들었습니다.
바로 전철을 타려다가 광화문역 8번 출구 맞은편 종로빈대떡이 눈에 띄었고, 어머니가 잠깐 앉았다 가자고 하셔서 가볍게 빈대떡과 막걸리를 들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기분 좋은 피곤함이 밀려와서 일찍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걸음수를 확인해 보니 대략 2만 6천 보나 걸었더군요. 그래도 조금 힘든것쯤은 신경도 안 쓰일 만큼 충실한 하루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날 좋은 가을에 경복궁을 한 번 방문해서 보시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