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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Lee Mar 19. 2017

2011년 9월 말

쉐어생을 받다


호주로 이사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이미 우리가 살 집을 렌트해서 계약까지 하고 멜번으로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비싼 집이었다. 지은 지 몇 해 되지 않은 여러 채의 집들이 붙어있는 타운하우스였는데 방이 4개였고, 화장실도 3개에, 욕실도 2개인 아주아주 비싼 집이었다. 처음에 멜번에 올 때만 해도 방 4개 중 3개를 쉐어 주면 렌트비용을 거의 만회하게 될 것 같아서 비싼 집을 구하는 것에 그다지 부담이 없었다. 물론, 방 하나를 우리 네 식구가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쉐어생을 구하는 광고를 멜번한인커뮤니티 다음카페에도 올리고 Gumtree라고 하는 유명한 사이트에도 올렸더니 순식간에 쉐어를 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본인이 KBS방송작가인데 호주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다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여성작가, 워킹홀리데이로 왔다며 짧게 알바를 하고 있는 커플, 호주에 온 지 5년째라며 영어공부 조금만 더 해서 영주권을 딸 거라는 메카닉하는 동생...


시간이 지나니 다들 사연이 있어서 하나둘 떠나고 새로운 쉐어생을 광고를 통해 받게 되었고, 이제 곧 결혼할 거라는 커플을 받았다. 둘 다 멜번에서 나름 유명한 한인베이커리의 공장에서 베이커로 일하는 사람인데 같이 지내기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새벽같이 일하러 나가고 저녁 일찍 들어오는데 집 안에서는 거의 소음을 내지 않는다. 저녁도 거의 밖에서 먹고 들어와서 집에서는 요리도 거의 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는)정말로 퍼펙트한 쉐어생들이었다.


몇 달 후, 이 커플 중 남자의 여동생일 워킹홀리데이비자를 받아서 당분간 머무른다며 싱글룸을 하나 추가로 쉐어하기로 했다. 새로 들어온 동생은 영어를 하나도 못하는데 이제 막 영어공부를 과외로 시작하는 완전 영어초짜였다. 그리고 오빠 소개로 오빠가 일하는 한인베이커리의 시티점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그렇게 조용하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아침이 되어서 우리 식구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동생분이 계단을 쿵쾅쿵쾅 내려오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마구 쏟아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용은 이렇다.


"알바를 밤 10시쯤 마치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신발을 벗고 발을 마주보는 좌석에 올려놓고 오고 있었는데 옆칸에서 어떤 아저씨가 건너오더니 자기가 경찰이라면서 발을 좌석에 올려놓는 것이 불법이니 티켓을 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저씨 얼굴을 보니 칼자국 흉터도 있고 경찰유니폼도 안 입고 있어서 너무 무서웠어요. 정신도 하나도 없고 그래서 'I don't know. I don't know.'했더니 딱지를 끊어야 되니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는데 신분증을 안 가져가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너무 당황되어서 주소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한참을 그렇게 'I don't know'만 말하면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더니 나중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가더라구요. 그런데 좌석에 발 올려놓는 것이 불법이예요? 그리고 경찰이 제복 안 입고 다니는 경우도 있어요?" 라며 아직도 흥분되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것이다. 좌석에 발 올려놓는 것은 불법 맞다. 딱지를 끊는다면 아마도 $250정도, 당시 한국돈으로는 28만원 정도였다. 다행이 영어를 못해서 딱지를 안 끊었다며 한숨을 쉰다.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그래서 그 날 영어학원에 가서 선생님에게 경찰이 제복을 안 입고 다니는 경우도 있냐며 상황을 대충 설명해 줬더니 가끔은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이번 경우는 경찰이라기보다는 PTV(Public Transport in Victoria)의 인스펙터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20살 어린 아가씨가 밤늦게 혼자 기타를 타고 가다가 얼굴에 흉터 있는 인스펙터를 만나는 상황을 떠올려보니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겠구나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쉐어생들이 참 많다. 다음 번엔 이상한 쉐어생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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