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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dia Apr 15. 2021

일과 삶, 미래를 위한 오늘

독서 메모: <숨>, <내일을 위한 내 일>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 테드 창, <숨>, 엘리


테드 창의 <숨>에서의 위 구절을 읽은 후, 잠깐의 숨으로써의 삶을 나는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할지, 우리의 짧은 숨이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어떻게 온전히 누릴 수 있을지, 그리고 주어진 잠깐의 숨 속에서 나의 일로써 세상과 타인, 그리고 우리 공동의 삶 안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이다혜 저자의 인터뷰집 <내일을 위한 내 일> 책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잠깐의 숨으로써 삶, 그 삶과 일에 대한 태도

<내일을 위한 내 일>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7인의 여성을 만나 일과 직업에 관한 생각을 나눈 인터뷰집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라면 분명 나의 고민과 결이 비슷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에 대한 다양한 답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서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고 싶었고, 아주 어렵거나 정말 운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을 알고 싶었다. 


"작품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왜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지 가장 많이 생각해요. 완성되었을 때 이 작품이 어떤 가치를 지닐지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게 제게는 큰 도움이 돼요. 그러면 기준이 생기니까 뭘 버릴지, 뭘 가져갈지 정할 수 있죠. 그리고 핵심을 전하려면 끝까지 만들어야 해, 이렇게 다짐해요."

이다혜, <내일을 위한 내 일> - [못 하겠다는 생각은 서랍 속으로_영화감독 윤가은], 창비


살아남은/성공한/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여러 여성들의 태도 중 첫 번째로 정답처럼 와 닿았던 답은 매 순간 가장 중요한 가치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끝까지 해낸다는 것이었다. 나도 내가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 일을 통해 이루고 싶은, 바뀌지 않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떠올려보았다.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은,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

"환상을 키우고 싶지 않아. 내가 이렇게 될 걸 누가 알았겠어요. 그날그날 살아온 거지. 매일 성실하게 사는 것 말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다만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만 계속 생각하면 되지 싶어요. 내 가치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것이었지, 남들 앞에 나서서 리더가 되거나 정치를 하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내 가치만 정하면 돌아가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거예요. 금방 이루지 못할 수 있어요. 나도 그랬고. 그래도 가는 거지. 뚝심이 있는 게 중요한 거 같아. 뚝심 있게 가다 보면, 어느 경지에 도달해 있는 거지."

이다혜, <내일을 위한 내 일> - [가치를 생각하면 멀리 볼 수 있다_범죄심리학자 이수정], 창비
"글을 쓰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부가적인 활동이 자기에게 잘 맞나? 출판 소설은 작가 노출이 많고, 웹소설이나 드라마 작가는 실시간 악플이 문제고. 성격에 안 맞으면 정말 큰 괴로움이에요."

이다혜, <내일을 위한 내 일> - [안 되면 되는 길로 간다_작가 정세랑], 창비


일의 중요한 가치나 커다란 목적보다 부수적인 일들이 나를 구성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일을 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시간 속에는 늘 부수적인 일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작은 순간들 또한 나의 일의 일부이고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과 삶이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루를 성실히 살며 내가 원하는 가치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바라본다면, 그 매일을 구성하는 시간 안에는 어떤 어려움과 행복이 있을지 작은 부분들까지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도네시아에서 토바 화산이 크게 폭발한 적이 있어요. 화산재가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넓은 지역에 오랫동안 구름이 드리우면서 지구 상의 식물, 동물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봤죠. 그런데 인도쯤 되는 지역에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석기 공작소가 발견되었어요.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나는 석기를 만드는, 그런 느낌 아시겠어요? 눈 떠 보니까 나는 살아 있었던 거죠. 그래서 오늘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인간이 '우리가 없어지면 이 세상이 끝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자만은 없다고 봐요. 인생에서 저는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고 생각해요. 아, 지금까지 놀이터에서 잘 놀았다. 나는 이제 학교에 가야 되고 다른 애들이 놀아야 하니까 놀이터를 치워야지. 청소도 하고, 모래사장도 가지런히 하고, 운동장이 기울어졌으면 판판하게 해 놓고, 쓰레기가 있으면 치우고.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인간도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단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없어진 세상을 준비하기. 그것은 우리가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에요.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고 다음 세상을 생각하니까요."

이다혜, <내일을 위한 내 일> - [심드렁하게 계속하기_고인류학자 이상희], 창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반은 후련하고 반은 담담한 기분으로 용기를 얻기도 했다. 거창한 목표를 이뤄야 한다며 지나치게 자만할 필요 없이, 반대로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고민으로 괜히 주눅 들거나 움츠러들 필요도 없이, 무엇이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뻔뻔히 해나가는 것이 나의 자리와 주어진 숨에 가장 충실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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