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FF의 두번째 날

밑빠진 가방(루스탐 캄다모프)

by Paul Simon

1.두번째 날


어떤 영화제를 출근하듯 다음 날 다시 가는 건 처음이었다.아마도 전주라 가능했을 것이다.한 시간 정도의 거리,비록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거리라면 대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평소 출퇴근 시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두번째 전주행을 시도했다.그러나 지각.오전 영화들을 놓쳐버렸다.꼭 시간과 거리만이 원인은 아니었다.몇달간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아침에 전화를 하셔서 아버님을 뵈러 가야 했던 것이 또다른 이유였다.나는 아침 일찍 전주에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로 향했다.(어머니는 일요일 아침 예배를 빠지시는 일이 결코 없다)


아내와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무등산 올라가는 길의 스타벅스엘 들렀다.입원해 계시는 동안 아버님이 가장 좋아했던 마실거리가 스타벅스의 바닐라 라떼였으므로 우리의 스타벅스행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일요일 아침의 별다방은 의외로 고적했다.산등성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아내는 다시는 아버지와 병원 바깥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을 줄 알았다며 다행스런 심정을 얘기했다.나도 그랬다.나 역시 아버지가 병원에서 쉽게 나오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약간 오버스런 생각이긴 하지만 지겨운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망이 재활을 앞당긴 거였을 수도 있다.


아내는 자신만 남겨 두고 전주를 향하려는 내게 약간 삐진 것 같았다.야단은 나중에 맞기로 하고 전주로 출발했다.


2.밑빠진 가방 (루스탐 캄다모프)


그리하여 jiff 두번째 날의 첫 영화는 러시아의 루스탐 캄다모프의 <밑빠진 가방>이 되었다.영화제 안내책자는 이 영화에 대해 소개하면서 일본의 두 거장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언급하고 있다.아쿠다카와의 <덤불 속>을 구로사와가 <라쇼몽>이란 이름의 걸작 영화를 만들었고,이 영화 <밑빠진 가방>은 <라쇼몽>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라는 거다.다시 말해 이 영화는 러시아판 <라쇼몽>이라는 거다.


두 가지 생각.첫번째는 라쇼몽이 러시아로 건너 가서 어떻게 변화되었을 것인가 하는 기대.그러나 두번째는 도대체 무엇 하러 <라쇼몽>을 리메이크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과 실망.거기엔 내가 이미 <라쇼몽>을 이미 완결된 영화적 세계로 보고 있다는,그리고 이 영화를 진실의 말랑말랑한 가소성을 다루는 후대의 수많은 영화들의 효시로 보고 있다는,다른 의미에서 내가 <라쇼몽>을 어떤 쟝르로 보고 있다는 내 스스로의 고정관념이 잠재해 있다.


또 그것은 결국 남게 될 것은 의상 디자이너를 겸하고 있다는 루스탐 캄다모프가 펼치는 시각적 향연-화려한 코스튬 파티와 정교하면서도 이국적인 미쟝센- 밖에 없을 거란 불안감을 미리 영화를 보기 전부터 품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뭐,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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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으니까..)


왕자와 왕자비가 있었고 그들을 습격하는 강도가 있었으며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목격자가 있었으며 그들 모두가 그들 나름대로의 진실을 얘기한다는 <라쇼몽>의 이야기는 여전히 이 영화에서도 반복되었다.그러니까 그쪽 이야기의 흐름은 1950년의 구로사와 아키라 버젼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다만 목격자 무리에 포함되는 부류들이 다르긴 했다.숲속의 버섯과 러시아의 곰이 목격자로 등장했다.비록 목격담을 증언하지는 않지만 그들도 목격자라는 사실을 캄다노프는 분명히 했다.버섯 모자를 쓴 어린 배우들이 숲속을 뛰어다니고 숲속 오두막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번뜩였으며,곰의 탈을 쓴 배우가 살인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배회했다.또 러시아적인 마녀가 등장해서 살해당한 왕자를 살려냈으며-그래서 이 이야기가 일본에서 러시아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으며-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등장하여 사건 전체에 표현주의적인 느낌을 불어넣었다.일본의 박진감은 러시아로 건너와 환상담으로 변모한 것이었다.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어떤 사건의 목격자로 기능하며 발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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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둘은 살인을 목격한 버섯들이다.그리고 둘 사이에 위치한 구체는 가끔 화면 위로 출몰하는데 때로는 저렇게 하나,또 어떤 때는 서너개 정도가 모여서 대기 중에 떠 있다.화면 속의 인물들은 저 구체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목격자들의 범주 속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라쇼몽>적인 이야기는 이 영화 속에서 30% 정도의 지분 정도만 가지고 있다.이 영화엔 좀 더 광대하고 풍성한 또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타이틀인 <밑빠진 가방>인데,이것은 아라비안 나이트,즉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한 꼭지의 이야기로부터 비롯된 제목이다.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방을 훔쳐서 잡히게 되지만,훔친 자가 그 가방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통에 가방의 내용물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쪽이 가방의 주인이라는 재판관의 결정이 내려지게 되고,그 가방의 내용물에 대한 무한한 이야기와 논쟁이 벌어진다는 그야말로 천일야화적인 이야기가 바로 <밑빠진 가방>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훔친 자와 도둑맞은 자가 주장하는 가방 속에 든 내용물은 무척이나 다양하다.시종과 짐승과 건축물과 도시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가방 안에 들어있지 않을 만한 것들이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고 그들은 말하며,이야기는 이야기에 꼬리를 물고 영원히 이어질 듯 보인다.(<라쇼몽>의 이야기 결과는 분명히 다른 이야기다) 게다가 결국 그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고 판명되는 것은 한 조각 레몬에 불과하다.그러나 이쯤 되면 레몬은 그저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기 위해 동원된 소품일 뿐,이야기의 실체는 가방 안에 들어있을 거라고 상상되는 물건들,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들이다.-역시나 <라쇼몽>과는 다르다.이 이야기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진실과 진실의 변형이 아닌 이야기 자체인 것이다.물론 레몬으로부터 시작한 전혀 다른 생각도 가능하다.이러니 천일야화인 것이다..-


루스캄 캄다모프의 <밑빠진 가방>에서도 '밑빠진 가방'이 등장한다.이 영화에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공작인 이야기의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인 '머리가 열 개 달린 이야기꾼'이란 별명을 가진 여인이 바로 '밑빠진 가방'으로 상징되는 이야기꾼인 것이다.그러나 <라쇼몽>과는 달리,오히려 천일야화에서처럼 분명한 화자와 청자가 존재하고 화자인 여인은 마치 '밑빠진 가방'에 등장하는 이야기들과 이야기들처럼 영원한 얘기들을 청자인 공작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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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가방을 가지고 있다.가방 안을 바라보며 이야기-가방의 내용물- 를 상상하고 정리한다)


로마노프 왕조의 무기력한 왕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작은 여인에게 이야기 값을 지불하고 특히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청하게 되는데, 여인이 공작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라쇼몽>적인 이야기 -왕자의 살해,왕자비의 실종,그리고 제각각인 관계자들의 목격담- 이다.청자와 화자는 이 사건에 대해 서로 토론하며 이야기의 결론 없는 끝을 향해 달려가지만,영화 속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영화 자체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또다른 이야기를 전환시키게 된다.


그것은 우선 공작의 과거사이다.공작은 자신의 어머니인 대공비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에 심각한 무기력과 정신적 외상에 빠지게 되는데,대공비의 죽음이 화자가 진행하는 이야기와 모호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공작은 점점 대공비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인에게 의견을 묻기까지 한다.여인은 대공비가 개로 환생했다고 대답하는데,이때 희한하게도 어딘가로부터 개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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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인은 이야기와 추측에서 멈추지 않는다.그는 공작이 기거하는 저택 이곳저곳을 탐색하는 듯 보이며 커다란 벽의 벽지를 뜯고 안쪽을 찔러보기까지 한다.즉 여인은 대공비 죽음의 진실을 찾고 있다.<밑빠진 가방>식으로 얘기하자면 실제로 가방 속에 들어있었던 레몬 한 조각을 찾고 있는 것이다.(현재의 러시아에서 다시금 그 후손들이 부활하고 있다는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의 원인,그리고 그것의 러시아 혁명과의 상관관계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이 영화 속엔,대공비의 죽음과 여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왕자의 피살,그리고 왕자비의 실종 이외에도 또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그외에도 이 영화에는 마치 <밑빠진 가방>속의 무한한 이야기 가지의 존재처럼 또 하나의 선이 영화 내내 간간이 등장하며 관객의 신경을 건드린다.대공과 여인-청자와 화자-,그리고 라쇼몽적인 주인공 이외에,대공의 저택에서 일하는 시종들과 시녀들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여인의 이야기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여인이 저택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그녀는 조금은 특이한 고깔 모자를 머리 위에 쓰거나 코에 끼우고 있다.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공주를 도와주었던 요정들이 썼던 것처럼 생긴 고깔 모자다.(그녀는 요정이나 마녀일까?) 그러나 그녀는 가끔 고깔을 코에 끼우기도 한다.그리고 그 고깔 키우기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있다.잘생기고 건장한 러시아 청년들인 궁전의 시종들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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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고깔을 코에 끼우고 벽을 더듬고 있을 때,여인과 공작이 있는 방 바깥에 서 있던 시종들 역시 코에 고깔을 끼운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코에 끼운 고깔.코를 감추기 위한 고깔.(좀 엉뚱하긴 하지만 거짓말 할 때마다 자라나는 피노키오의 코가 생각나지 않는가.그렇다면 저 고깔은 거짓-이야기 를 감추기 위한 고깔인 건가.) 또한 시종을 연기하는 저 배우들은 여인이 얘기하는 왕자살해사건에서 왕자와 추적자 그리고 강도를 연기하는 배우들로 출연하기도 한다(확인은 안했는데 그랬던 것 같다)


시종들 뿐만이 아니다.여인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 뜬금없이 등장하는 시녀는 여인의 라쇼몽적 스토리에서의 왕자비의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연결하는 행동을 보여주며,또 가끔 여인과 공작의 얘기를 염탐하고 엿듣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그밖에도 갑자기 나타나는 캐릭터들이 화면 왼쪽에서 나타나 오른쪽을 향하여 총총히 퇴장한다.그 어떤 연결점도 없는 듯 보이는데 말이다.그들은 끊임없이 공작과 여인이 얘기를 주고 받고 있는 방과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


<밑빠진 가방>에서처럼,이렇게 이 영화에서는 서로의 연결점이 모호한 수많은 세계들이 등장하여 요동치고 있다.그러나 고요했던 이 세계를 격동시킨 것은 결국 이야기다.허구였든 진실이었든 이야기-허구-구라-가정의 세계는 끊임없이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준다.여인의 이야기는 공작에게 자신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일깨우고 - 그렇게 해서 공작이 상징하는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과 현대 러시아의 상황을 가늘게 연계시키고- 저택 구성원들의 행동과 심리에도 영향을 준다.이야기가 세계를 구성하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반면 그 역도 가능할 수 있다.영화 속 현실의 캐릭터들 역시 여인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다.대공의 반응은 화자인 여인에게 미세한 변화를 일게 하고 어떤 때 여인은 방 바깥의 존재들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화자인 여인은 이야기 도중에 계속 저택의 진실을 찾으려 고깔 모자를 쓰거나 코에 끼운 채 저택의 벽 뒷쪽을 탐색하며,어쩌면 이야기는 이 세계 속의 무언가를 찾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현실 역시 이야기의 기반 조건 속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여인은 저택을 나와 스키를 신고 눈길을 걸어 사라진다.

이야기는 사라지고 저택은 그대로 남는다.그러나 마지막 여인의 표정엔 이상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이야기꾼-예술가로서의 승리를 말하는 건가.글쎄다.밖은 여전히 춥고 그녀는 또다른 이야기 값을 벌기 위해 또다른 저택으로 향할 것이다.그러나 또 여인은 자신의 밑빠진 가방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통해 현실에 생채기를 줄 것이고 벽 속의 진실을 찾게 될 것이다.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야기꾼-예술가의 이야기가 틀림없을 것이다.물론 영화가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간간이 들리는 사이렌 소리가 러시아 혁명 전야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러시아 관객이라면 당시의 역사를 현재의 러시아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거다.또 어쩌면 열개의 머리를 가진 이야기꾼인 그녀는 라스푸틴 같은 비선실세를 비유하는 존재였을 수도 있었겠다.그러나 나는 전주에 있었고 러시아까지 생각하긴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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