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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Simon May 28. 2018

통행증(크리스티안 펫졸드)

No transit No exit

1.비 그리고 밤


저녁이 되자 비가 내리고 날씨가 좀 싸늘해졌다.무언가를 먹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가, 영화제를 즐기는 젊은 씨네필들의 무리와 곳곳에서 마주쳤다.한 우산 밑의 커플들,비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도시에서 매년 열리는 영화 축제를 즐기는 각양각색의 시민들,우산 없이 비를 맞으면서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는 사람들..저들에게 이 비와 이 갑작스럽게 추워진 대기는 일종의 추억이 될 것이었다.몇 년이 지나 이 거리를 다시 찾게 될 저 무리들 중 일부는 '아,몇 년 전 이 거리에서 갑자기 내린  비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고 지금을 기억하며 묘한 자부심을 느끼게 될 터였다.


영화제는 영화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날씨 역시 영화제의 일부이며 날씨의 변화 역시 '그때 그 영화제'를 떠올리는 기억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내게도 그런 영화제가 여럿 있다.몇 년 전의 어떤 전주는 황사와 강풍으로 얼룩져 있었다.나른하고 안온한 봄을 기대하고 왔다가 맞닥뜨린 전혀 예상치 못한 강한 바람과 매캐한 먼지를 나는 기억한다.희한하게도 그때 보았던 영화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포르투갈 영화였던 것일까.그러나 황사와 강풍은 여전히 내 기억 동네 언저리에서 그때의 영상을 내 눈 뒷쪽으로 떠오르게 한다.


2.통행증 (transit 크리스티안 펫졸드)


마지막 영화는 독일의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펫졸데가 맞나?) 의 <통행증>이었다.


일요일 저녁 프로그램답게 영화관 안은 관객으로 꽉 차 있었고 전주 외부에서 온 사람들 보다는 전주 시민 관객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근거는 없다) 중년의 부부 관객들도 꽤 많아 보였는데,어쩌면 영화제 안내 책자가 언급한 클래식 영화 <카사블랑카>와 이 영화의 유사성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었다.또 역시나 근거는 없지만 영화제 프로그램 역시, 주말이나 휴일 저녁엔 조금은 대중적인 영화를 배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이건 추측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에 끌린 것은 <카사블랑카> 때문도 아니고 크리스티안 펫졸드 때문도 아니었다.영화제 홈페이지가 이 영화에 대해 짧게 소개하는 글에 담긴 정체성과 신분 문제 때문이었다.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은, 이 영화가 우연히 얻게 된 다른 사람의 신분 때문에 파시즘이 지배하는 유럽으로부터 멕시코를 향한 탈출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사람에 관한 영화라고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정체성의 변화,달라진 신분과 그에 따른 변신,그리고 탈출, 두 말 할 것도 없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였고 내가 가장 열광하는 주제였다.


정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이런 주제들에 대한 내 끌림은, 아마 나를 구성하는 어떤 핵심적인 감정과의 연관 때문일 것이다.핵심감정.일단의 정신과 의사들이 유난히 강조하는 개념이다.그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감정이야말로 그를 결정하고 이끌어나가는 에너지일 거라는,그래서 자신의 핵심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스려 나가는 것이 삶을 잘 살아나가는 첩경이라는 주장.나는 이 주장에 거의 100% 공감한다.그리고 나는 내 핵심감정이 바로 이런 요소들,변신과 탈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어쨌든 나는 같은 시간에 상영하는 다른 영화들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이 영화를 예매했다.언젠가,이런 주제를 가진 영화들을 골라서,골방에 틀어박혀 모두 다 보고 난 다음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그러나 내게 그런 시간이 올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안나 세거스가 쓴 1942년 소설 <수용소>가 원작이라고 했다.1942년과 수용소.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당연히 홀로코스트.나치와 유태인이다.신분 세탁에 성공하여 유럽을 탈출해야 하는 유대인의 얘기가 연상되는 것이다.또 크리스티안 펫졸드 역시 과거에 이런 종류의 문제들을 다루었던 영화감독이다.동서독의 문제를 통해서 (바바라),홀로코스트와 유대인 문제를 통해서 (피닉스) 그는 이런 문제들에 이미 손을 댄 바 있다.


주인공 남자 게오르그 역시 유태인으로 보였고 영화 속 유태인들은  대청소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영화가 시작되는 장소는 프랑스 파리였고 그는 어떻게든 파리를 탈출해서 항구 도시 마르세이유를 향해 떠나지 못하면 수용소로 끌려갈 상황이다.영화는 파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체포되어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돈을 받고 수락한 우연한 심부름을 계기로 자살한 소설가의 시체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프랑스를 떠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멕시코로의 떠남을 보증해주는  통행증이다.즉 신분 변화와 탈출의 가능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지체없이 마르세유로 향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뭔가 좀 이상한 게 있다.게오르그를 비롯한 인물들의 패션은 20세기 나치 치하의 그것처럼 보이는데,그들을 색출하고 끌고 가려는 경찰들의 복식과 무기는 그때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공권력의 모습은 거의 21세기의 그것이다.그래서 마치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의아한 심정을 갖게 된다.


거기엔 영화 자체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명시하지 않은 탓도 있다.무언가가 시간 속에 섞여 있다.영화 속 거리에 등장하는 자동차들도 2차 대전 이전의 것이 아니다.훨씬 이후의 것이다.그렇다면 21세기? 21세기에 등장한 신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 대륙 전체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집어넣어버린 것일까? 영화는 가상적인 21세기 현실을 1940년대의 상황과 혼합시켜 놓은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면 저 고색창연한 통행증은 또 무엇인가.21세기에 어떤 나라를 떠날 수 있는 통행증에 떠나는 사람의 사진도 없고 또 개인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 자체가 저리도 허술하게 담겨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역시나 무언가가 뒤죽박죽되어 있고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무언가로 보인다.


가정 하나.이런 효과를 통해 스크린 속 상황을 무언가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하기.꼭 유태인과 나치가 아니더라도,사회의 약자가 될 만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추방과 억압으로 기능하는 홀로코스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황을 현재 유럽의 현실과 연결지어 묘사하기.파시즘과 유사 파시즘이 겨냥하고 목표하는 일들은 언제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악몽을 스크린 위에 재현하기.그렇게 해서 유럽을 휩쓰는 난민들의 문제를 다시금 상기시키기.뭐,이런 효과도 가능해 보였다.


(이 사진은 유럽 대륙의 통행증을 발급 받는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이다.이 풍경과 이 영화 <통행증>에서 통행증을 발급 받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일치한다.난민들은 현대의 유태인들인 것이다.그리고 유태인을 제압하고 학살하는 나치의 모습은 또한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는다.파리에서 탈출한 주인공이 멕시코로 떠나기 위해 대기하는 마르세이유에서 또다른 이야기가 진행되며, 내가 주목했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마르세이유에 도착해서 자살한 소설가 바이덴의 이름으로 멕시코로 떠날 수 있는 통행증을 얻는 데 성공한 게오르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게오르그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와 함께 기차를 타고 파리를 탈출했으나 기차 안에서 죽은 사람의 가족이다.아프리카 혈통으로 보이는- 그러니까 역시나 2차대전의 나치 치하라고는 볼 수 없게 만든다- 엄마와 아들로,어린 아들과 게오르그는 금방 친구가 되는데 엄마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다.그런 가족에게 게오르그는 아빠와 남편의 죽음을 말해야 한다.어쨌든 그는 그 가족과 유대를 가지게 되며, 천식을 지병으로 앓고 있는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자 어려움을 뚫고 의사를 부르기까지 한다.아이와 게오르그의 장면은 매우 여러 번 진행되는데,아이는 게오르그가 마르세이유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그리고 그 심리적인 절망이 천식 발작을 유도했던 것이고 말이다.그러나 게오르그에게 가족이란 유대감과 감정을 안겨주던 이 모자는 결국 어딘가로 사라진다.영화는 이들이 당국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갔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사라졌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게오르그가 멕시코로의 출항을 기다리며 묵는 허름한 호텔엔 개 두 마리를 끌고 다니는 여인이 있다.개 주인이 개를 맡긴 채 이 항구 도시를 이미 탈출했고,이 개들의 존재가 그녀에게 통행증을 얻게 될 일말의 가능성을 갖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게오르그와 그녀 사이엔 약간의 연대감이 있다.그러나 이 여인의 삶은 자살로 마감된다.그녀의 자살이 개 두 마리의 죽음으로 인해 통행증의 가능성이 사라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개 두 마리의 죽음에 대한 감정이입 때문이었는지 역시나 영화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 밖에도 게오르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지옥도의  일부로 표현된다.자신을 현대음악가로 소개하며 음악을 통해 중남미로의 통행증을 얻을 수 있다고 헛된 자신감을 표시하던 남자는 미국 대사관 내에서의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게오르그가 만나는 사람들 중 이 지옥을 탈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정적인 사람은 게오르그가 훔친 통행증의 원소유자인 소설가 바이덴의 아내인 마리다.마리는 먼저 바이덴을 떠났으나 다시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 남편을 마르세유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말한 상태다.그러면서도 마리는 이곳에서 다른 남자를 만났으며 또 그에게도 일정 부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마리는 남편 바이덴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더더구나 게오르그가 남편의 신분을 훔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아내는 대사관을 통해 남편인 바이덴이 마르세이유에 나타나 - 사실은 바이덴의 신분으로 위장한 게오르그다- 통행증을 발급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후 남편을 찾아 도시의 모든 곳을 헤매 다닌다.마리가 찾고 있는 것이 남편인 바이덴인지 아니면 바이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녀 자신의 통행증인지 역시 불분명하다.(어쩌면 그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그녀는 거의 불쑥,거의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게오르그의 눈 앞에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데,당연히 게오르그가 그녀에게 가지는 심정은 매우 복잡하다.죄의식과 연민 만이 아니다.그는 거의 대책없이 그녀에게 이끌리게 된다.


물론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다.그녀에 대한 이끌림 자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그녀를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녀가 그의 정체를 고발하면 그의 탈출 가능성은 완전히 봉쇄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지옥이다.정치적인 지옥에 이은 내면의 지옥.거짓 정체성의 문제가 가져온 근본적인 지옥이다.


그리고 누구든 이런 지옥을 만났을 때,자신의 핵심 감정이 발동되며 자신의 결정적인 진면목을 스스로 보고 또 남들에게 보여주게 된다.가령 게오르그는 모든 것을 모른 척 하고 혼자서 멕시코로 떠날 수 있다.또 모든 걸 밝히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한 후 그녀의 결정을 기다릴 수도 있다.지옥 속에서야말로 모든 가능성이 피어나는 것이다.그 상황에 처한 그가 선택한 길은,마리에게 어딘가 바이젠이 존재하고 있는 걸로 가정하고 (그러니까 또 하나의 거짓 세계를 만든 이후에) 자신의 중재 하에 (그녀는 그가 바이젠의 신분을 훔친 것을 모르므로)그녀의 통행증을 받아주는 것이다.그러나 지옥 속에서의 일들이 그렇게 쉽고 부드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가 멕시코로의 출항을 거부하는 것이다.마리는 어떻게든 남편 바이덴을 찾겠다고 주장하며 떠남을 늦추려 한다.결국 게오르그가 선택하는 것은 자기 희생이다.그는 그녀를 속여 자신의 통행증을 마리가 마르세이유에서 만났던 남자에게 양도하고 그녀의 탈출을 유도한다.영화제 소개 책자가 소개하는 <카사블랑카>식 해결 방식.감연한 희생을 마다 하지 않았던 험프리 보가트식 존재 방식.여전한 사랑으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잉그리드 버그만을 떠나보내기.



지옥도 내부에서의 생존법.그러나 누군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생의 한 방식.그럼으로써 관객의 심금을 울려대길 원하는 영화제작방식.그러니까 이런 방식 역시 20세기의 영화가 유지해 왔던 ,그리고 관객과 공모하길 원했었던 핵심적인 감정 중 하나다.


그러나 21세기의 크리스티안 펫졸드는 이런 영합을 원하지 않는다.그는 자신의 캐릭터들의 탈출 계획을 좌초시켜 버린다.게오르그로 하여금 멕시코로 향하던 배가 기뢰에 의해 폭침 당했다는 비보를 듣게 하는 것이다.마리를 죽게 함으로써 그는 게오르그가 마리에게 건넸던 통행증을 죽음을 향한 통행증으로 만들어 버린다.따라서 결국 게오르그와 펫졸드의 영화는 마르세이유와 유럽 대륙이란 영원한 지옥도 속에 머무르게 된다.또한 그럼으로써 영화는 유럽을 영원한 지옥으로 확정짓게 되며 그의 주인공 게오르그로 하여금 영원히 마르세이유의 카페에 앉아 마리의 환영을 보게 한다.


 <카사블랑카>적인 세계 역시 더 이상 영화 속에서 가능할 수 없게 되었다는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고 영화가 끝나고 가볍게 터진 일부 관객들의 박수는 내게 이 사실에 대한 동의로 느껴졌다.이 박수는 역설적인 해방감이었다.


3.비


영화 속 지옥은 세찬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에서 가벼운 충만감으로 바뀌었다.언제나 영화를 보고 나면 드는 뿌듯한 감정 -물론 좋은 영화를 보았을 때에나 가능하다.좋지 않은 영화를 보게 된 후 밀려오는 후회는 어떤 때 인생 시간에 대한 후회로까지 발전된다- 이 마치 끝없이 이어질 듯한 튜브 안처럼 느껴지는 빗속 고속도로 속에서 나를 맴돌았다.한 시간 후면 다시 현실로 되돌아가게 될 터였고 이렇게 이렇게 인생은 또 흘러가게 되는 거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지옥은 어디에나 있으나 결국 마음 속에 있다.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며 신분의 변화와 탈출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또 탈출 이후에도 여전한 세계와 여전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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