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아른하다

5월 광주를 다룬 영화들

by Paul Simon

6월은 아른하다.



'아른하다'라니,좀 이상한 단어다.표준말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말인지도 모르겠다.아른하다는 '나른하다'와는 다르다.나른함은 아른함 보다 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느낌을 준다.어딘가 풀어지고 부드럽게 헤쳐지는 느낌을 주는 단어다.그에 비해 아른함이 내게 주는 인상은,또 떠올리게 하는 감각은 다분히 시각적인 것이다.구름 너머에,수평선 너머에,무언가 맑은 것이 무언가 결말을 안겨줄 실마리가,그러나 이제야 휴식을 제공할 안온함이,분명한 형상은 보이지 않지만 그 어디에서인가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그런 느낌,그것이 아른함이며 그것이 6월의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갈망과도 같은 것이다.희뿌연 간절함,옅은 농도의 열정이 섞인 소망,제동장치가 없는 집착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무형의 기도,그런 갈망이 언제나 6월이면 내게 찾아온다.


그러나 사실 이런 종류의 정조(tune) 라면 6월 보다는 3월에서 5월에 이르는 시간,그러니까 봄에 찾아오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몸을 저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혹독한 추위를 벗어난 3월에,Paul Simon이 when streams are ripe and swelled with rain(시냇물이 풍성하게 빗물로 넘쳐흐르던 그때) 라고 노래했던 4월에,그래서 마침내 그녀가 온다고 (april come she will) 읊조렸던 4월에,그도 아니라면 완벽한 봄인 5월에,사실은 바로 그런 때가 무해한 갈망에 어울리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우리나라의 봄날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혹은 반대로 궁극적인 평화를 위해 싸웠던 치열한 여름에 더 가까웠다.폭력과 피와 분노와 눈물이 범벅을 이루었고 죽음으로 이어졌던 패배와 간헐적인 정치적 승리가 맞물리며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던 시간이 그 시절의 봄날이었다.어쩌면 한때 저항운동의 전위였던 학생운동이 언제나 3월 개학에 맞춰 전열을 정비했고 그 후 봄이 끝나는 시기까지 직진하여 봉기하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또는 봄 자체의 온기가 사람들을 광장으로 이끌게 하고 또 모이게 하고,추위가 연상시키는 정권의 폭압을 이겨낼 뜨거운 기운으로 변해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그렇게 그 시절의 봄날은 갔다.


그리고 그 봄날이 끝나면 언제나 6월이 왔고,사람들은 어느 정도 대열이 느슨해져 버린 그런 6월엔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갈망에 천천히 사로잡혔다.


지금부터 나는 6월 이전의 그 봄날들,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모든 봄날들을 있게 했던 1980년 5월 남부의 도시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쓰려고 한다.아니다.정확하게 말하자.그날들이 아니라 그날들을 그렸던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사실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젠 거의 상식이 되었다.일부 비뚤어진 극우 논객들이나 연구자들,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보수의 하수구로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를 몇몇 인터넷 사이트들이 지난 9년 보수 정권의 기세를 등에 업고 거의 협잡에 가까운 괴담들을 딴에는 열심히 앞뒤를 맞추어가며 유포했지만,그 수준이 그 시절의 진상에 진지하게 상처를 가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광주는,군부 독재의 적자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가장 끝자락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시민들을 총과 칼 -글자 그대로- 로 학살했던 반인륜적 범죄였다.발포명령자,자위권 발동,헬기 기총 소사,조준 사격 등등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논란이 여럿 있지만,결국 광주는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자면 난을 일으킨 역적들이 결국 권력을 쟁취해내는 데에 성공했던,짧다면 짧은 시기의 결정적인 출발점이기도 했다.그러한 결론은 이미 공인되었으며 논란의 여지는 전혀 없다.


또한 반대로 광주는 최초이자 최후,최후이자 최초인 어떤 저항자들의 상징적인 이름이었고,마치 어떤 종교의 시조처럼 대신 피를 흘린,그래서 그 이후 누구나 그 선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피의 기원이었다.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 공포를 이겨낸 몇백명 사람들의 존재가 시민적 자유의 시공간을 앞당기게 했고,그 경험의 역사는 뼛속에 각인되어진 두 가지 부류의 대조적인 DNA의 물결침 -저항에 이은 감연한 봉기와 두려움에 이은 엎드림 - 중 하나를 언제나 들썩이게 만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 정신의 시금석이 세월호였듯,또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각자 시선의 기준점이 남과 북의 평화이듯,1980년 이후 한동안의 바로미터는 광주였다.생래적으로 그런 시선을 반영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술은 제각각의 손과 발로 광주를 그려냈다.시와 소설이 등장했고 - 결국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중간 정점을 이루었다- 그림과 판화가 벽 위에 붙었다.(판화가 홍성담은 광주의 현장에 있었다)


임옥상의 작품이다
손기환-타타타타.jpg (손기환의 1985년 작품이다)


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렀고 교향곡이 저 먼 베를린으로부터 등장했다.


영화는 좀 늦었다.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영화적 접근은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이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야 기획되었고 상영되었다.물론 영화는 문학이나 음악과는 다르다.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여러 요소들이 혼재되어 구성된 집단 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그 요소들 중에는 언제나 자본이 포함된다.모든 자본들의 눈이 반드시 이윤 만을 향한다고 볼 수는 없고 한국의 영화 자본들이 일제히 광주를 외면했다는 증거는 없으나,자본 투입 자체의 어려움을 겪는다면 영화 제작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영화적으로 재현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광주 항쟁은 도시 전역에서 일어난 일이고 ,주요한 사건들 역시 결코 작지 않은 도시 중심부에서 발생했다.군부에 저항한 것은 도시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시민들 전체였으므로 공간 뿐만 아니라 인력도 필요했을 것이고 ,이 사건의 재현 속에는 총과 탱크가 등장하는 총격전을 포함한 전쟁영화적인 요소까지 동원할 것을 고려해야 했을 것이다.즉 재현의 어려움이 광주의 영화화를 지연시켰을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영화계 역시,고작 몇 년 전에 일어난,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반정부 반보수적인 색채를 띨 수 밖에 없는 현대사의 한 사건을 포용해 낼 수 있는 부피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1980년대 이전의 한국 영화계가 반체제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적도 거의 없고- 하길종은 1970년대에 잠깐 빛을 발했다가 사라졌다- 저항적인 인재 풀(pool) 들이 영화계로 대거 유입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더구나 1980년 이후의 군사 정부는 영상 문화의 위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그들이 펼친 3s정책 중 screen 과 sex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대중에게 다가왔고,80년대 초반의 에로 영화들은 70년대 후반의 호스티스 영화들과는 매우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애마부인'은 '77번 아가씨'보다 훨씬 더 자신의 성적인 욕망에 충실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애마부인을 허락했던 군부의 문화권력이 저항적인 영상문화,그것도 자신들의 원죄적 아킬레스건인 광주의 영화화를 허락할 리는 없었다.감시 체계가 상시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고 어떻든 이른 시일 내에 1980년이 영화화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


실제로 광주가 영화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였고,작업에 나선 사람들은 실험적인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칸트씨의 발표회 1987년 김태영),독립영화집단 (오!꿈의 나라 1989년 장산곶매),아직 주류 영화계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들 (부활의 노래 1991년 이정국) 이었다.이들의 움직임은 198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고,앞으로도 한국 영화계의 광주에 대한 알리바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5월 광주는 가끔씩 여러 형태로 영화화되어 나름의 필모그래피를 갖추기 시작했다.여러 형태의 접근,여러 형태의 이야기들이 30년의 시차를 두고 줄을 이었고 광주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는 그 시대의 정신을 웅변하고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지표가 되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광주에 살고 있으므로 광주에 관한 영화가 나올 때마다 주변 광주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었다.보편적인 반응은 언제나 조심스러움에 가까웠다.광주가 고향이라고 할 수는 없는 내가 그 조심스러움을 이해하는 데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광주 영화를 얘기할 때마다 '광주 사람들'이 시작하는 '일단 침묵'은 한국 현대사에서 폭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그것과 일정 부분 닮아 있었으나,어느 정도의 결과적인 승리가 담보된 이후에는 그 침묵이 여유로움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지만원이나 일베 유저들을 바라보는 이 사람들의 시선은 그저 인간 이하의 혐오스런 짐승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했고 아직도 간간이 뉴스를 장식하는 전두환에 대한 태도에서는 ,정확히 감지할 수 없는 회한 같은 것들이 깃든 것 같았다.이나마라도 진상이 밝혀진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5월을 6월에 얘기하는 것은 6월이 아른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이제 내 6월은 아마 정리도 가능해진 6월이 된 모양이다.그리고 이제 6월은 다 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 7월이다.삶은 이렇게 녹녹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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