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광주의 영화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시각일 것이다.視覺.point of view,시간 개념으로서의 시각이 아니라 관점으로서의 시각.사물의 어떤 부분을 주목하는 대뇌의 특정한 부분의 통합된 명령.
그러니까 그 사건을 바라보는 제작자의 관점이 어쩌면 그런 영화들의 빛깔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누구의 눈을 통해서,그의 어떤 정조와 생각을 가지고 사건을 서술하는가.이미 벌어져 버린 일들을 어떤 방법으로 또 어떤 순서를 가지고 묘사하는가.그래서 사건의 마지막을 어떻게 결정하고 장식하는가.이런 요소들이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주된 관찰 포인트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가장 초기의 영화들 중 하나인 <부활의 노래>가 선택한 관점은 광주 항쟁의 다양한 주역들 중 하나였던 운동권 학생들의 관점이다.특히 끝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광주를 사수했던 윤상원과 당시 전라남도의 국립대학인 전남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그리고 그들이 관계했던 야학인 '들불야학' 의 교사들과 학생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그 중에서도 철기라는 극중 이름을 가진 박관현의 이야기가 영화를 이끌고 나가는 주된 동력이며 그가 사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박관현은 광주항쟁이 시작되기 전 계엄당국의 예비검속을 피하기 위해 광주를 빠져 나가 광주 인근의 도시로 도피했으며,그 후 2년여의 수배 끝에 체포되어 수감된 후 옥중 단식 끝에 사망한 인물이다.또한 광주 항쟁이 본격화된 5월 18일 이전 광주의 전라남도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대중 집회를 이끌었던 학생운동세력의 주역이었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대중연설로 광주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바로 박관현이었다.
또한 영화는 박관현의 막역한 선배이자 들불 야학의 동료 강학이었던 윤상원 - 그는 박관현과는 달리 광주항쟁 기간 이전에 광주를 빠져나가지 않고 계엄군에 맞서다 계엄군의 최후 진압 도중 사망했다- 의 이야기를 함께 엮는데,그를 위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광주항쟁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78년으로 그 시침을 돌려놓는다.주역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얘기해 나가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광주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를 놓고 본다면 광주 지역 학생 운동의 전사와 처했던 상황,나아가서 1970년대 말 유신 치하의 한국 학생 운동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느낌도 받게 한다.
붉은 색깔의 영화 제목이 떠오르고 광주시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 후 - 그러나 주변의 광주 시민들에게 물어보니 저 화면에서 보이는 광주는 1980년 이전의 광주는 아니라는 거다.특히 화면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네모난 흰색 건물은 조선대학교의 어느 단과대학 건물인데 저 건물은 한참 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거..(뭐 좀 쓸 데 없는 이야기..)-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 등장하는데,거기에서부터 벌써 철기(박관현)는 학생운동권 내부로부터 총학생회라는 좀 더 커다란 조직과 제도를 만들어내어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싸움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암시하고 있는 반면에,지금도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고 있는 이경영이 연기하는 태일(윤상원)은 좀 더 다른 종류의 모색을 준비 중이다.그는 단순한 투쟁 보다 결정적인 이론적 토양을 중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그렇게 태일은 좀 더 학생 운동권 외부에서의 투쟁이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철기 보다는 더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생각하고 있다.영화는 이렇게 학생운동권의 어떤 양상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윤상원은 노동 운동 쪽에 더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박관현 역시 처음에는 총학생회장 출마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그의 연설 능력을 비롯한 카리스마를 높이 산 윤상원이 출마를 강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영화의 서사는 그 다음 해인 1979년으로 넘어가는데 그 해를 그리는 영화의 모습은 철기와 태일이 교사로 봉사하는 들불 야학의 야유회로 대표된다.이 역시 당시 학생 운동의 한 풍경이다.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도시 노동자들을 돕기 위한 야학.정규 교육과 더불어 노동법을 강의하는 조그만 클래스.지금은 사라진 모습이다.
(언젠가 보았던 모습? 이창동의 <박하사탕>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둥그렇게 둘러 앉아 노래 부르는 야학 학생들 사이로 설경구와 문소리가 애틋한 눈빛을 주고 받던 장면 말이다 단 그 장면의 설경구와 문소리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다.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박하사탕>과 <부활의 노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랄 수도 있다.<부활의 노래>에서의 로맨스는 야학의 교사와 교사 사이(윤상원과 동료 강학),교사와 학생 사이(박관현과 그를 좋아하는 학생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영화는 계속 철기와 태일의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태일은 사회 변혁을 위한 과학적 신념을 역설하면서도 쿠데타와 죽음을 예감하며 악몽을 꾸고,철기는 총학생회를 부활시켜 회장에 당선된 후 정권에 협력했던 교수들의 교수실 문에 대못을 박는다.물론 영화가 이들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태일의 과학과 신념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장면이라곤 태일의 자취방 벽에 붙여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판화 복사본 이외엔 거의 없고,박정희의 쿠데타 장면과 함께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태일의 죽음에 대한 예감엔 어느 정도 과장의 혐의가 있다.또 어용 교수를 몰아내자며 교수실 문에 못을 박기 이전 -뭐 이런 일은 당시에 실제로 많았지만- 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철기와 동료 학생들의 모습 역시 약간의 실소를 자아낸다.(하지만 그땐 또 그랬다.당시 교수들의 위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그리고 영화는 다시 세월을 훅 건너 뛰어 1980년 5월의 전설적인 광주 도심 횃불 성회와 계엄 당국의 예비 검속을 피해 광주 외곽으로 도피하는 철기 일행의 모습을 보여 준다.즉 영화는 5.18 이전의 광주의 학생운동 얘기를 꽤 세밀하게 훑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시각 자체,그리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바로 대학생 출신의 운동가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더구나 영화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광주에 끝까지 남아서 싸웠던 태일 보다는 도피 후 수배 생활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철기의 삶을 영화가 주로 따라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시각이 도피라는 죄의식 자체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싸워야 했지만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그래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가없는 죄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 영화의 동일시는,광주항쟁이 끝난 후 10년이 흐른 그 시점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광주에 대한 죄의식에 이 영화가 기초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물론 이 죄의식으로부터 또다른 동력,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얘기하는 '부활' 이 비롯되었지만 말이다.
또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시점에서, 광주 항쟁의 주된 동력원을 학생운동권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도 하는데,여기엔 1980년대 중후반에 벌어졌던 반정부 투쟁의 선봉에 학생 운동권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주었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영화는 광주 항쟁 기간 자체를 건너 뛰어 버린다.(물론 공연윤리위원회라는 정부 단체의 검열을 의식했을 가능성과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광주항쟁을 영상화한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철기의 수배 생활과 그의 야학 제자이자 그를 짝사랑했던 현실과의 이야기로 훌쩍 넘어가 버린다.우여곡절 끝에 현실을 만나게 된 철기는 그제서야 광주에 남았던 태일을 비롯한 동료들의 최후를 전해 듣게 되고,그들의 최후에 대한 현실의 전언은 철기의 죄의식에 결정타를 날린다.불면과 악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악몽과 불면은 이 영화의 일관된 태도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죄의식이 낳은 일종의 증상으로서 영화는 악몽과 불면을 동원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광주 항쟁 자체에 대한 묘사는 일정 부분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다시금 당시의 시대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나 반드시 시대 상황을 절대 한계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이 영화는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몇몇 실상을 묘사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전남도청에서의 마지막 밤의 묘사 역시 미숙하게만 처리되지 않았다.많은 물량을 투입할 수 없었고 사진 등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영화는 잔혹한 진압의 폭력을 일정 부분 생생하게 묘사해냈다.훗날의 광주 영화에 그렇게 많이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윤상원을 연기한 이경영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를 관통해 그가 보여주었던 연기의 색깔 - 따뜻함과 다정함을 갖춘 관조적인 아웃사이더- 을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항쟁 최후의 밤에 다다르면 훗날 윤상원이 가졌던 신념의 일부를 적절하게 보여 준다.죽음을 앞둔 유언이나 최후 진술 같은 장면에서도 그는 비장함과 따스함,인간적인 면모와 투사적인 면모를 적절하게 융합시켜 표현해 낸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도망친 자의 죄의식이라는 기본 전제를 덜어내지 못하고 다시 철기의 훗날로 포커스를 이동시키며 그의 단식투쟁에 이은 사망과 다시 남은 자가 되어버린 현실을 비롯한 동료들이 윤상원 뿐만 아니라 박관현 마저 부활시키게 될 새로운 야학을 준비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그래서 이 영화의 부활은 광주의 현장에서 산화해 버린 영혼들 뿐만 아니라,광주에서의 일들에 대한 무한한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부활 까지 한꺼번에 포괄하고 있다.어찌 보면 매우 상식적인 결말이다.
다만 이 영화가 만들어진 때는 광주 항쟁이 일어난지 겨우 10년이 흐른 때였다.참혹한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가해자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당시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겨우 걸음마를 떼고 있을 때였다.여전히 광주에서의 일들에 대한 왜곡된 시각 -공산주의자들이나 북한 스파이의 사주에 의한 도시 빈민들의 폭동 등- 역시 건재했으며 진상의 규명은 초기 단계에 불과했다.다른 종류의 결말이나 전개를 생각하기가 매우 어려운 때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또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 (이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의 죄의식을 단순한 퇴행이나 패배감으로 치부해서도 안된다.그땐 죽음과 폭력이 지금 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고 또 매우 직접적이었으며 권력 기관의 폭력을 자유롭게 외부에 알릴 만한 방도도 거의 없었다.그 점을 고려한다면 자책과 눈물을 부활을 위한 최초의 발걸음으로 제시하는 것도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또 실제로 광주의 부활은 바로 그 죄의식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는 끝까지 부활을 묘사한다.철기가 옥중 단식 끝에 사망하고,그의 아이를 가진 현실이 광주로 돌아왔을 때,영화는 카메라를 광주 망월동의 5.18묘역으로 가지고 가,죽은 태일(윤상원) 과 영화 속 그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미숙의 영혼 결혼식을 뷰 파인더에 담게 한다.
실제의 윤상원 묘 근처에서 촬영된 듯 보이는 이 장면은,무녀의 등장으로부터 옷가지를 태우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벌어졌던 1982년의 영혼 결혼식을 - 윤상원의 영혼의 파트너는 그를 들불야학으로 이끌었던 박기순 ( 광주지역의 노동운동가였으며 광주 항쟁 이전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다) 이었다 - 최대한 재현해 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며,그들의 결혼과 철기 (박관현) 의 죽음,그리고 현실과 철기의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을 이어붙이며 부활 시리즈를 영화적으로 완성한다.
그들은,또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정말로 부활하고 싶었던 것이며 결국 광주는 부활했다.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만듦새 만큼은 영화가 만들어진 1980년대 말과 1990 년대 초반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왕비장하기만 한 정서와 문어체의 대사,뒷전으로 밀려나기만 하는 여성 캐릭터들,특히 남녀간의 관계들을 묘사하는 대목의 전형적인 촌스러움 -심지어 철기와 현실의 첫날밤 장면은 촛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 그야말로 물 한 그릇 떠다 놓고 치르는 결혼식이다.굳이 옷 벗기는 동작을 묘사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철기는 현실의 벗은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현실은 또 고개를 수줍게 외로 꼰다- 은 70년대,그러니까 광주 항쟁 이전의 우리나라 영화들의 만듦새와 닮아 있다.
(그들은 첫날 밤을 이렇게 시작한다.비현실적이라는 뜻이 아니다.더구나 여성 캐릭터의 이름은 현실이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촌스러움을 이해해 달라,이 영화의 부활이 눈물과 한숨,그리고 죄의식과 자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은 그냥 변명이다.1980년대 후반은 코리안 뉴 웨이브라 불렸던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흐름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였고,쟝르 영화들 역시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 변화를 추진하기 시작할 때였다.바뀜의 기운이 왕성했던 시절이란 뜻이다.그러나 이 영화는 동시대 영화들의 분위기 조차 따라잡지 못했다.
영화가 만들고 싶을 때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가내수공업 제품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해볼 때,이 영화가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최초의 35mm 상업영화였다는 사실을 되돌려볼 때,이것은 매우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이제 와서 어쩌는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시절엔 광주를 소재로 한 또다른 영화들이 존재했다.
(계속)
ps1.지난 20 여년 동안 끊임없이 광주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박철민.그는 당연히 <부활의 노래>에도 등장한다.광주 최후의 날,도청을 사수했던 시민군 역할이었다.
(그는 민중 집회의 단골 사회자였고 별명은 민주 대머리였다.그렇다면 지금의 머리숱은 어떻게 된 걸까..)
ps2.이 영화의 고증을 담당했다고 이름을 올린 임낙평은 오랫동안 들불야학을 지켰던 광주의 운동가다.영화는 처음부터 야학 출신의 운동가들을 상정했던 거다.
ps3.'부활의 노래'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광주의 시인인 문병란이 1982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 때 두 사람을 추모하며 쓴 시다.
ps4.이 영화의 감독 이정국은 나중에 최진실과 박신양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편지>를 만들었다.제도권 내로 들어온 것이다.또 이 영화의 공동 제작자 주경중의 필모그
래피 속에는 <동승>과 <나탈리>가 포함되어 있다.매우 이색적인 스펙트럼의 필모그래피다.
ps5.태일과 미숙의 장면에서 태일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실천문학>이다.
ps6.태일의 피앙세 미숙은 도청 최후 진압의 날,태일의 종용으로 현실과 함께 도청을 빠져 나와 도청 인근 교회 지하에 숨는다.(이 에피소드는 광주항쟁에 관한 르포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기록된 에피소드이며,21세기에 만들어진 광주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도 언급된 일화다.) 그러나 최후 진압의 총성이 울리자 교회를 빠져 나와 도청을 향해 달리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게 되는데,그녀가 죽게 되는 계단 위엔 어린 아이와 함께 한 엄마가 있고 그 엄마 역시 사망한다.그래서 결국 아이만 계단 위에 서 있게 되는데,이는 물론 <포템킨>의 어떤 대목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의 도청 최후 진압 시각은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였다.그 시간에 아이 안은 엄마를 계단 위에 세워둔 것은 명백한 오버다.게다가 인근 교회 지하에 숨어 있다가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려던 여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태일과의 영혼 결혼식을 위해서 미숙을 사망하게 했다는 이유 이외에 다른 까닭을 생각해낼 수 없는데,이런 자의적인 연출 역시 되짚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약간 안타까울 뿐이다.
다음 영화:오! 꿈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