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책 (폴 서루)
복잡다단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어느 정도 다른 안테나를 세우고 뇌 속의 주파수를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것은 내 삶에서 가끔 도래하는,어쩌면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골치 아프고 번거로운 행사 같은 상황일 것이다.나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이런 일들을 여유있게 처리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지는 못했다.그래서 생각한다,지금까지 안 되었다면 영원히 안 될 거라고.뭐 상관 없다.삶의 여정 중 '거기서 거기까지'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씩 책을 읽었다.A4 용지 하나를 접고 또 접어서 책갈피에 끼워 넣고 간간이 떠오르는 생각을 재빨리 휘갈겨가며 여름을 버텼다.그 책 중 하나와 그 메모 중 몇 가지가 오늘의 글이다.
책은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이다.
1.여행을 연상시키는 영어 단어는 여러 가지다.
travel - journey - trip - tour - voyage
또다른 단어들도 있다.
paseo - expedicion - rundreise - wafering
그리고 being stranger
이 중 어떤 단어를 여행이란 이미지와 매치시키는가가 각 개인의 여행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이다.
2.현실 도피를 위한 여행자라면,자신의 세계를 단기간이나마 완전히 잊기 위해서 떠난 여행자라면,적어도 여행하는 그 순간 만큼은 '접속'을 끊어야 한다.어떤 여행의 경우 SNS는 적이다.
3.낙천주의와 용감함 그리고 무모함과 현실감 없음을 혼동하지 말아야.혹은 혼동해야 여행자가 된다.
4.여행자가 쓴 여행기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5.황량함,침묵,고요함
집을 나와 다섯 시간 안에 이런 감각들을 얻을 수 있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그러나 거리나 시간은 전혀 관계가 없을런지도.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그 계통의 감각을 뽑아올리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그런데 문제는 또 디테일에 있다.감각,시야,불편함,타인들,기록에 대한 욕구,소음과 냄새,빗나가기 일쑤인 기대.
6.여행지에 가면 언제나 생각한다.
-나는 내가 살았던 모든 장소들을 떠올릴 수 있는가.
7.가장 바보 같은 여행자들이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꾼다.로맨스는 여행 실패로 가는 첩경이다.(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8.사람들이 공포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그 인공적으로 제조된 공포가 그들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문득 느껴지는 새로움을 전달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짧은 여행들을 유도하는 마음들의 본질적 기제가 아닐까?
9.가끔 산책이 우리를 구원한다.
산책자 - Saunterer ?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이 성 어거스틴이었던가 ?
그러나 우리는 도시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강하게 매여 있다.어디로 떠나든 귀환을 약속해야 한다.그것은 강요라기 보다는 관성이다.그렇다면 도시에서라도 걸어야 한다. 그런 걷기는 flaneur ? 이 단어를 어디서 보았더라 .발터 벤야민?
10.나는 브루스 채트윈 여행기의 어떤 부분이 분명한 거짓말일 거라고 느낀다.그럼에도,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은 매혹적이다.
11.언젠가 노마드에 매혹된 적이 있다.그러나 노마드의 기원이 유목민들이라면 생각을 좀 달리 해야 한다.그들의 기본적인 특성이 속도와 기동력이기 때문이다.그들은 아마 기습공격에 능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며,평화나 안온함 과는 거의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2.걷기에 가장 좋은 때는 아마 해질 무렵,좀 더 고전적인 표현으로는 땅거미가 지는 시간일 것이다.그러나 옛시절의 땅거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아니 그 시간대에 우리는 주로 어디에 있는가.
13.여행 이후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풍경에 대해 묘사할 때,우리는 여행으로 인해 새겨진 우리 내면의 모습을 다시금 이미지화하는 것인가,아니면 그 사물이나 풍경의 수많은 증인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마는 것인가.
14.SNS가 가장 내밀한 의미에서의 종교를 파괴해 버릴지도 모르겠다.사람들은 SNS를 통해 끊임없이 접속하고 타인과 교류하고 자신을 현시한다.고독해질 시간이란 없다.그러니 신과 종교를 찾게 될 일도 없다.그러나 종교는 파괴되더라도 시스템으로서의 종교,친목 단체-사교 클럽으로서의 종교는 살아남을 것이다.점점 기괴해져 가는 모습으로.
15.언젠가 우리는 죽은 지인들이 산 지인들 보다 많은 시점에 도달하게 되겠지.
16.어쩌면 여행기란 기억을 거래하는 책일 것이다.
17.서울에 살든,뉴욕에 살든,타스매니아에 살든 우리는 우리가 디자인한,우리의 네트워킹에 익숙한 매우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잠깐 동안의 여행으로 그 디자인과 네트워킹을 부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8.문득,먹는 것 조차 아까울 정도로 시간을 소중히 생각했던 시절이 기억났다.그 당시 나는 사람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지속해 나가면서,안 먹는 것의 이점에 관한 리스트를 머릿속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거식증의 전조는 아니었다.간헐적인 폭식이 뒤따랐으니까.
19.가장 좋은 여행 장소는 완벽한 고독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속된 생각.장소가 고독을 제공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착각.거기에 움직이지 않은 채 내면으로만 침잠해도 고독에 대한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는 가련한 희망까지 더해진다면 이 문단의 첫 문장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그럼에도 착각과 불가능성과 희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자리에 남겨놓고 싶어지기도 한다.
20.가장 행복한 장소?
- 죽을 때 이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곳.
21.현재 가장 가고 싶은 곳?
-Oakney isl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