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은 왜 이재명과 윤석열의 싸움이었을까
47.83% VS 48.56%, 역대급 접전인 동시에 95%의 표가 거대양당에 몰린 보수와 진보의 전력전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 따라붙는 딘어가 하나 더 있었다. '비호감 대선'. 어느 유력 후보도 국민들의 호감을 얻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이재명, 혹은 윤석열을 뽑았다. 왜 호감도가 높았던 안철수는 대선 후보가 되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거대 양당이라는 선택지만 주어졌을까?
우리나라의 대선과 지선, 그리고 국회의원 300명 중 253명은 단순다수대표제로 선출된다. 가장 많은 표를 받으면 단번에 당선된다. 윤석열 당선인은 48.5%의 대통령이 아니다. 비록 1% 차이도 안나지만 상대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것만으로도 온전한 대통령이 되었다. 당연히 이재명 후보도 47.83%의 대통령이 아닌 완전한 패자이다. 그리고 이런 승리의 공식은 양당제로 이어지게 된다.
뒤베르제의 법칙은 수권 여당과 정권을 탈환하려는 야당의 연합으로 양당제를 설명한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은 가설이다. 권력을 위해서는 서로 맞지 않더라도 뭉쳐야 한다. 표가 찢어지면 지게된다. 조금 삐걱거릴지라도 우리 편이기만 하면 그 표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 맘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고 0.5표만 행사할 수 없는 것이 선거이다. 표가 찢어지면 진다. 우리는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두 개의 거대 정당 중 하나가 100% 맘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할 뿐이다. 적당히 맘에 들면 힘센 우리 편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이 개인들에게 '적당히 맘에 들기 위해' 거대 정당들은 아주 대중적인 선택을 하였다. 우리 편을 많이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미 따놓은 표는 제쳐두고 중도층의 표를 공략한다. 경제학자 해롤드 호텔링(Harold Hotelling)은 이를 '중위투표자 정리'로 설명한다. 보수와 진보는 콘크리트 층의 표는 신경쓰지 않고 중도의 표를 얻기위해 중도보수, 중도진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텍스트만으로는 맘에 들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와닿을 뿐이다. 이 글에서는 호텔링 이론을 기본으로 정당의 영향력과 유권자의 선호가 정치 형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정리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정치는 왜 양당제인지, 왜 우리는 기존 정치와 차별성있는 선택을 하기 어려웠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지난 20대 대선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선거제도 하에서 다당제의 가능성을 논할 것이다. 이 방법은 대단히 '지리학적'일 것이다. 우리가 집 앞 순대국집, 혹은 순대국 맛집을 찾아가는 일상적인 선택으로 치환해도 같은 해석이 떨어질 것이다.
거대양당의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차별성없는 공약을 내놓고, 서민을 찾는다. 단순히 서민들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다. 그들의 우리 국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를 가져와야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20대 대선에서는 기초 연금과 병사 월급 인상 등 '공약 베끼기'가 논란이 되었다. 그들이 정치적 소신이 없고,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자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알기 때문이다.
호텔링 이론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제한된 지역 안에 두가지 상점이 존재하는 경우를 가정하자. 두 상점은 같은 상품, 같은 가격으로 시장을 양분하고 있으며, 각각의 판매에 대한 수익은 일정하다. 이때 두 상점의 시장 점유율은 그들의 수익과 정비례하게 된다. 넓은 시장 점유율을 가지기 위해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다보면 결국 중앙에서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 주게된다. 집 앞에는 하나도 없는 카페가 시내를 나가면 몰려있는 이유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이라면 내쉬 균형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첨고 링크: https://pguin.tistory.com/1268)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변형하여 적용할 수 있을까? 정당의 영향력이라는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정당의 영향력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당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바람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얻는다. 이 설득은 정당의 권력과 당선가능성, 정책의 적절성과 현실성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당의 영향력이 크다면 선호도가 조금 다르더라도 표를 가져가고, 영향력이 작다면 아무리 특정 집단을 타게팅 하더라도 표를 가져가지 못한다. 영향력이 작으면 잊혀지거나, 신뢰받지 못한다.
물론 정당의 영향력은 모호한 개념이다. 그러나 정의당 지지자라도 정의당보다 국민의 힘이 더 큰 영향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당의 근본적인 영향력 자체는 잘 바뀌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했던 당시,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두자리 숫자마저 위태했지만 그 영향력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고, 그 결과가 20대 대선이었다.(물론 단기적인 선거에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모든 표를 독점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정치적 성향과 멀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정당이 가진 영향력과, 우리의 개인적 선호를 계산해가며 선거를 치룬다. 지난 19대 대선에서는 수많은 태극기 부대는 눈물을 머금고(?) 박근혜를 내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반대로 이번 대선에서 3%의 국민은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었던 심상정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들의 이상과 이재명 후보의 간극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런 '선거의 공식'은 아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호텔링 이론에 성향 차이에 따른 선호도 감소를 반영한 것이다.
보수 정당인 붉은 정당은 A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진보 정당인 푸른 정당은 B의 영향력을 가진다고 가정해보자. 한명의 유권자인 'ㄱ'씨의 정치적 성향에서 두 정당은 어느정도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거리가 멀수록 정당에 대한 선호도는 떨어지게 된다. 'ㄱ'씨는 붉은 정당에 대해서는 'a'의 선호도를, 푸른 정당에 대해서는 'b'의 선호도를 가지게 된다. 이때 'ㄱ'씨는 붉은 정당과 더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a'가 'b'보다 크다. 결과적으로 'ㄱ' 씨의 표는 보수정당인 붉은 정당으로 가게 된다.(이때 선호도의 기울기는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이를 '정당 선호도 곡선'이라고 부르자. 특정 정당이 우리의 성향과 멀어지면 해당 정당에 대한 우리의 선호도는 떨어지게 된다. 다만 정당의 영향력이 너무작으면 우리에게 정책에 대한 신뢰를 줄수 없으며 심지어는 공들여 우리가 정책을 찾아보게 만들지도 못한다. 말 잘통한다고 동네 교회 집사님을 대통령으로 뽑아줄 수는 없다.즉, 정책적 방향과 별개로 영향력이 작다면 유권자에게는 선호도가 떨어지게 된다.
이런 양당제 상황에서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호텔링 이론이 보여주듯 넓은 점유율을 가지면 기존 지지자들의 선호도는 떨어질 수 있겠지만, 같은 '한 표'들을 더 가져올 수 있다. 아래 그림처럼 진보 정당이었던 푸른 정당이 아주 조금만 보수적으로 바뀌면(그러면서도 붉은 정당 보다 진보적이면) 기존보다 많은 표를 가져올 수 있다. 기존의 표를 모두 유지하면서도 붉은 정당을 선택한 'ㄱ'씨의 표도 가져온 것을 알 수있다.
이후의 선택은 예상 가능하다. 보수정당이던 붉은 정당은 오히려 푸른 정당보다 아주 조금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준다.(이런 '진영 교체'는 현실성이 떨어지고 같은 상황의 반복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후 시나리오에서는 배제하겠다.) 그러면 기존의 표는 모두 뺏길지언정 진보 층의 표와 중도층의 표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이 반복되면 두 정당은 결국 가운데에서 만나게 된다. 호텔링 이론의 완벽한 예시이다.
안철수는 정계 입문부터 꾸준하게 제 3의 길을 모색했다. 성공한 IT 사업가였던 안철수의 정계 입문은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났던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고, 안철수는 그에 힘입어 단번에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었다. 그러나 선거에서 제 3의 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 시장과 대통령 선거만 2번씩 '양보'했다. 안철수는 왜 완주하지 못할까? 안철수의 정치 인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영향력이 같은 3개의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물론 더 많은 정당이 존재할 수 있고, 더 존재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핵심은 표의 숫자이다. 얼마나 진심을 다해 표를 던져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래와 같이 3개의 정당이 각자의 점유율, 즉 투표율을 나눠가진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을 고려해보자. 붉은 정당, 푸른 정당에 더해 중도 성향의 초록 정당이 등장했다. 이때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거대 정당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1-1. 진보(보수)정당의 중도화
먼저 진보(보수) 정당의 중도화가 있다. 그림이 보여주듯 푸른 정당이 약간 보수적으로 움직이면 기존의 지지층을 유지하면서도 초록 정당의 지지층을 흡수할 수 있다. 이후의 결과가 예상가는가? 붉은 정당도 마찬가지로 중도화를 시도할 것이고 초록 정당은 높은 영향력을 가지고도 선거에서는 거의 표를 받을 수 없다. 거대 양당 사이에 낀 중도 포지션은 '중도층'을 제외하고는 표를 얻을 수 없다.
큰 영향력을 가진 초록 정당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지지층을 거의 잃어버리지 않은 붉은 정당과 푸른 정당은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초록 정당이 소신을 가진 중도 정당이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치적 포지션을 다시 잡을 것이다.
1.2. 중도정당의 repositioning.
중도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초록 정당은 움직이기로 한다. 만약 기존의 붉은 정당보다 더 보수적이거나, 푸른 정당보다 진보적으로 자세를 잡는다면 결국은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의 연속이다. 양당제 상황에서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균형을 잡았던 것을 생각해보자. 3개의 정당이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싸움을 할 경우 하나의 정당은 결국 가운데에서 몰릴 수밖에 없다. 이런 끝나지 않는 결과를 피하려면 결국 중도보수, 혹은 중도진보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앞서 언급한 진영 교체의 경우이다.)
이 글에서 제시한 모델에서 이론적으로 초록 정당은 포지션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지지층을 늘릴 수는 없다.(성향차이에 따른 선호도 감소의 기울기가 같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조금이라도 유리한 포지션이 있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초록 정당의 지지율이 아니다. 어차피 초록 정당에게는 승리는 불가능하다. 위 그림처럼 움직일 경우 초록 정당은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도 푸른 정당에게 절대적 협상력을 가질 수가 있다. 초록 정당에 간 표는 선거의 결과를 정하는 캐스팅 보터가 될 것이다.
초록 정당이 기존보다 진보적인 포지션을 잡게되면, 중도진보층은 푸른 정당보다 초록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가게 된다. 반면 중도 보수층은 초록 정당보다 붉은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다. 아주 작은 선호도의 차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한 사람의 표는 단 하나이다. 적당히 나눠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푸른 정당과 붉은 정당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팽팽했던 싸움은 '붉은 정당'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각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붉은 정당은 이미 승리한 상황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다. 초록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기존의 양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실 그래프로만 이야기하면 푸른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움직이든 패배할 수 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지지층을 가진 초록 정당이 미치광이 전략(상호 손해인 상황을 만들어서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전략)을 이용한 것이다. 푸른 정당은 초록 정당과 공멸하거나 덩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합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초록 정당은 표는 적을지언정 선거 결과에 있어서 영향력은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둘이 공멸하는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없다. 영원의 시간동안 서로 버티면서 자신들과 거리가 먼 붉은 정당에게 계속하여 권력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든, 정치적 이상의 차원에서든 차라리 서로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나은 선택이다. 결국은 통합이 유일한 선택지이다. 그런데 통합이라함은 결국, 원점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초록 정당이 나타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제 3당의 등장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결선투표를 따로 두면 초록 정당과 푸른 정당이 진보 진영의 대표 자리를 걸고 계속하여 대결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례대표제라면 초록정당은 어느정도 지지율에 맞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 표가 한 표가 될 수밖에 없는, 승자는 하나인 단순다수대표제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4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더 복잡해질뿐 결론은 같다.
19대 대선 당시, TV 토론회에서 심상정 후보의 "대통령이 되면 국가가 나서서 청년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발언에 홍준표 후보는 "대통령 될 일 없으니 그런 꿈은 안 꾸셔도 된다"고 답하였다. 정말로 솔직하고 맞는 말인가? 맞다고 한다면, 심상정 후보의 대선 출마는 의미없는 일인가? 이번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의 2.37% 득표는 아쉬운 결과였지만,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득표율 차이인 0.7%를 세 번은 뒤집고도 남을 숫자였다. 이재명을 대선에서 패배하게 만든 것은 같은 '좌파'인 심상정이었다.
모든 선거에서 후보 번호가 5번 정도를 넘어가면 후보들의 공약은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인가?
사실을 고백하자면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정당 선호도 곡선'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굳이 영향력과 성향 차이에에 따른 선호도 감소를 그리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가능한,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누군가가 이미 이야기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 선호도 곡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배경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듯 정당 사이에는 규모와 영향력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정당 선호도 곡선'의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곧 군소 정당의 존재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21대 국회 253석의 지역구 국회의원 중 거대 양당에 속하지 않은 당선인은 단 6명이었다. 이중 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제외하면 무소속 당선인 5명은 모두거대 양당에 속했다가 내부 갈등으로 일시 이탈한 인원들로 홍준표, 윤상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굵직한 정치인들이 포함되어있다. (이 중 이용호 의원만이 입당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나머지 4명은 모두 복당하였다.)
이전의 내용을 보면 다음 질문들이 떠오른다
첫번째, '당선되지 못하는' 군소정당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두번째, 왜 군소 정당은 극단적인가.
우리는 군소정당을 쉽게 '이상한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치 판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아니, 오히려 거대 정당이 당선을 위해 정치 전략을 강요받는 동안, 실질적인 '결정'을 하는 것은 이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들이 그러한 포지션을 잡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극단적으로' 가야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거대 정당은 각각 보수와 진보의 중간이 아닌, 중도에 치우치게 된다. 당연하게도 중도층에서 거대 정당의 선호도는 높고, 양 극단에서 거대 정당에 대한 선호도는 낮다. 군소 정당이 아무리 영향력이 크더라도 이 두 정당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무난한 정책을 내는 정당보다는 극단적인 정당이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은 관심만 받는 것이 아니라, 표도 함께 가져간다. 단순히 재밌어서가 아니다. 군소정당들이 한 표라도 가져오기 위해서는 거대정당들이 신경을 못쓰는 극단으로 가야한다.
21세기 들어 일시적인 당내 분란을 제외하고 거대양당 외의 정당이 '중도' 포지션을 보이고 자리잡은 경우는 안철수의 국민의 당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물론 국민의당도 오래지않아 분해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극단에서 군소정당 하나가 생겨난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정당의 선택은 무엇일지, 그리고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자.
극단적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당의 이름은 노랑 정당이다. 가장 먼저, 노랑 정당 또한 호텔링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 완전한 중도에서는 아무런 표도 얻을 수 없지만,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잃지 않는 선에서 비교적 중도에 가까운 표를 끌어오는 포지셔닝이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정당이 규모가 커지면 이 경향성은 더욱 강해진다.규모가 커지면 00당 2중대가되는 이유다.) 즉, 최초에 노랑정당이 생긴 시점에서는 극단의 표를 챙기면서도 최대한 중도에 가까운 포지션을 잡는다. 다른 '좋은' 선택지는 없다. 문제는 푸른 정당이다.
푸른 정당은 비상이다. 중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도 잃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극단적 진보계열의 표를 노랑 정당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영향력이 훨씬 작은 정당임에도 초록 정당에게 뺏긴 것과 맞먹는 표를 배앗기게 되었다. 여기서 푸른 정당이 더 보수적으로 움직여봐야 표에는 변화가 없다. 푸른 정당의 선택은 더 진보적으로 자세를 잡고, 노랑 정당이 가져온 표를 다시 뺏어 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붉은 정당의 승리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계속하여 이어진다. 위 그림의 상황에서 모든 표를 빼앗긴 노랑 정당은 더욱 진보 성향의 움직임을 보인다. 표를 다시 뺏긴 푸른 정당은 또한 다시 진보적으로 움직인다. 서로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결국 노랑 정당이 말 그대로 '극진보'의 포지션을 잡으면 균형이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붉은 정당은 더욱 많은 표를 얻게 된다. 극단적 진보 성향의 노랑 정당이 오히려 보수 정당의 집권을 도와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군소정당이 왜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들이 정치판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를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잠깐 본문을 벗어나서 정의당과 심상정의 역할을 좀 더 깊게 이야기해보자. 군소 정당의 역할과 깊게 연관되어있고, 이 글의 결말과도 밀접하다. 페미니즘은 이번 대선의 중요한 키워드였다. 많은 이들은 민주당이 페미니즘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고들 이야기한다. 나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자. 페미니즘은 분명히 '사회 중도'의 입장에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프로파간다이다.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특정 집단 외에서는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대선에서 여성가족부의 존속을 포기하지 못하는 등 페미니즘을 끌어안고 선거를 치뤘다.
그러나 민주당은 가장 표를 많이 챙길 수 있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들이 페미니즘을 포기했다면 페미니스트들의 표를 잃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 자체는 적지만, 이들의 결집력과 그 결집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정의당은 무시할 수 없다. 민주당은 페미니스트들이 차악으로라도 이재명을 뽑는 그림을 만들어야 했다. 목적은 어쨌든 성공이었다. 19대 대선에서 6%가 넘는 표를 가져왔던 심상정은 이번 대선에서 2.37%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 표들이 윤석열에게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민주당은 페미니즘을 안고 가며 '진보 계열'의 통합을 이뤘다.
민주당은 이 표를 얻는 것으로 잃을 표가 크지 않다고 본 것이다. 물론 전반적인 선호도는 떨어졌을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스트 표를 통쨰로 잃는 것보다는 중도의 표를 조금 잃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국민은 마찬가지로 위 표가 보여주듯, 애초부터 성별 갈등에 큰 관심이 없다. 이러면 선택은 단순해지지 않는가? 물론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페미니즘 때문에 졌다. 심상정한테 간 표를 조금만 더 뺏어왔으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페미니즘의 문제도, 민주당의 선택 문제도 아니다.
페미니스트틀 결속시킬 수 있는 정의당과 심상정의 존재가 민주당과 이재명에게 페미니즘을 강요한 것, 그 자체가 패배의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몰라서 선택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심상정은 이재명의 당선을 가로막은 가장 큰 적이었고, 안철수는 윤석열의 당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두 후보의 결심에 따라 울고 웃은건 거대 양당의 이재명과 윤석열이었다. 심상정 후보를 떠난 표들은 이재명에게 갔지만, 심상정을 떠나지 못한 표들은 윤석열의 당선을 도왔다. 그렇다면, 군소 정당은 왜 존재하는가? 실리를 위해서라면 결국 당선되지 못할 정당이고, 소신을 위해서라기에는 오히려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의 이론적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제 3당, 아마도 거대 양당의 사이에서 나타날 새로운 정당의 탄생은 가능할까? 호텔링 모형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두 거대 정당은 중도에 완전히 붙어 극소의 차이를 두고 진보와 보수로 갈려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그 소멸과 관계없이 애초부터 초록 정당의 탄생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두 눈으로 '중도 정당'인 안철수와 국민의 당을 직접 본 우리다.
거대 양당이 '중도적'이라는 것은 호텔링 모형과 우리가 보는 현실이 가장 크게 상충되는 부분이다. 많은 주제에서 거대 양당은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진영을 나누는 방식에 있다. 중도층의 표를 위해서는 중도의 정책을 취해야 하지만, 이들은 양 진영의 지지자들에게 이것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통'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은 국가의 정치를 둘로 나누는 시도를 한다. 더 진보적인 것도, 더 보수적인 것도 없는 것이다. 사실, 호텔링 그래프든 '정당 선호도 곡선'이든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들어맞지 않는다.
중도라는 '애매한' 자세는 지지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 이 반발이 반발이기만 할 때는 문제가 없다. 이들에게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틈을 비집고 노랑 정당과 같은 정당이 나타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없애지 못하면 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 자기 진영의 작은 정당들은 삼켜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아래 그림처럼 군소정당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차별성없고, 영향력 작은 정당에게 표를 던질 사람은 없다.
여가부 존속과 대북 제제 강화 등 다양한 사회의 이슈가 그렇다. 이들에게 정답은 명확했다. 여가부 개편이라든가, 미지근한 대북 제제 등 쉬운 말로 '적당한'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국민의 대부분이, 그리고 우리 국민의 '중도층'이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이유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여가부의 존속과 폐지 중 하나를 지지하기는 쉽다. 대북 제제를 강화하거나 약화할지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도 쉽다. 그러나 여가부를 개편한다거나, 대북제제를 얼마나 강화하고 약화할지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더구나, 중도층에게는 '쓸모'가 없다.
'중도층'은 정치 평론가가 아니다. 이들은 적당한 주제에 적당한 관심을 가지고 적당한 지지를 보낸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서 일견 극단적인 의견을 지지하는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여가부 폐지로 이어진다든가,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대북 제제를 강화해야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이들이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한 표를 위해 우리와 상관없는 공부를하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단, 이로 형성된 이분법적인 구조에서 군소 정당, 제 3의 정당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대 정당들이 정치이념을 이분법으로 나누려고 할 때, 군소 정당들은 극단에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외친다. 그렇게 누군가는 정치가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쳐서, 누군가는 그저 관심이 생겨서 군소 정당을 따라 '더'를 외치게 된다. 그렇게 이분법적 구조가 와해된다. 우리 정치는 극단적인가, 아니면 중도적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도를 지키려는 거대 정당과 이들의 사이를 벌리려는 군소 정당의 싸움이다.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거대 정당이 중도 정치를 추구하면 군소 정당이 나타나거나, 기존의 군소정당이 더 큰 힘을 얻고 거대 정당의 표를 뺏는다. 거대 정당은 결국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선호도가 떨어지더라도 표만 얻으면 끝이나, 극단의 표를 잃으면 중도층의 표도 의미없어질 수 있다. 이들은 '정통'이 되기 위해 가운데에서 거리를 둔다.
노랑 정당의 탄생을 이야기한 위 그림을 다시 보자. 노랑 정당이 푸른 정당의 표를 뺏어 온 것이 핵심이 아니다. 중도가 아닌 진보 계열의 정책을 담을 수 있도록 푸른 정당의 포지션을 고착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노랑 정당이 당선되지 못하면 정치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들은 푸른 정당의 당선을 통해 충분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거대 정당의 힘을 빌려, 그리고 거대 정당의 균형을 옮겨 자신들의 정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한 쪽에서만 나타났다는 것이다. 20대 대선이 그랬다. 정의당이 민주당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내기는 커녕, 오히려 보수진영의 승리를 도운 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범 진보계열의 적인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정말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정답은 거대 양당의 사이를 양쪽에서 충분히 벌리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중도의 정치를 보고싶다면, 그리고 동시에 극단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거대 양당의 사이는 더욱 벌어져야 한다. 그래서 '초록 정당' 정도면 충분히 당선을 노려볼 수 있도록, 거대 정당과 협상해서 통합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닌 중도 정당으로서 충분히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 양당이 당선되면, 미지근한 중도가 아닌 각 진영의 이념을 담은 정치를 하게 된다. 이는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우리는 군소정당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중도 정당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이론을 통해 보았다. 그런데, 중도 정당이 나타날 때 극단에 있는 군소 정당들이 기존의 거대정당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아놓으면 결과는 달라진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경우, 중도 정당에게는 승리의 가능성이 생긴다. 호텔링 이론에 따른 효과를 받기 위한 기존 정당들의 '중도화' 시도가 극단의 군소 정당들에게 차단당한다. 이는 아래 그림으로 확인 가능하다. 양극단의 주황 정당(안타깝게도 브런치에서 주황색을 제공하지 않는다. 배경으로 대신 처리하겠다.)과 노랑 정당의 존재로 붉은 정당과 푸른 정당은 중도화를 실패하고 초록 정당에게 승리를 내주게 된다.
물론 여기서는 완전한 균형이 성립하지 않는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1등이 되는 것이다. 푸른 정당과 붉은 정당같은 거대 정당에게 당선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극단의 표를 내주더라도 중도화를 이루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혼자 움직였을 경우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붉은 정당의 입장에서 예를 들자면, 중도화를 이루면 초록 정당의 표를 뺏은 만큼 우선 주황정당에게 표를 빼앗기게 된다.(정당 선호도 곡선의 기울기가 같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황 정당이 호텔링 이론의 효과를 받으려할 것이라는 점이다. 주황정당이 아래 그림처럼 포지셔닝을 한다면 붉은 정당은 뺏은 것 이상으로 빼앗긴다.
그럼에도 거대 정당들은 움직여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1등이 아니면 의미없다. 문제는 이전에 초록정당만 등장했을 때와 달리, 먼저 움직이면 손해라는 것이다. 위 그림처럼 붉은 정당과 푸른 정당은 어느정도 중도화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붉은 정당은 푸른 정당보다 '더' 중도화를 이뤘다. 결과는? 극단의 표는 주황 정당에게 내주고 초록정당의 입지를 줄여 푸른 정당에게 승리를 내줬다.(?) 새로운 정당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다 극단의 표를 잃고, 결론적으로 초록 정당도 아닌 아예 반대 진영의 푸른 정당에게 승리를 넘긴 것이다.
즉, 기존 거대 양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중도화를 이뤄서 극단의 표를 내주고 초록 정당의 입지를 줄여야 하지만, 각각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들이 먼저 움직이게 되는 경우 결과가 더 안좋아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영원히 초록정당에게 승리를 내줄 수는 없다. 초록 정당이 처음 등장했을 때 결론을 기억하는가? 이론은 초록정당과 거대 양당 중 하나가 통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다르다. 거대 양당 사이의 합의가 필요하다.
양 진영의 중심에 있는 정당끼리 통합하거나 단일화하기는 현실적을 불가능하다. 방법은 딱 '초록 정당이 이기지 못할만큼만' 중도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결론은 아래 그림에서 확인 가능하다. 서로 지지율을 양극단의 노랑정당과 주황정당에게 내주고 초록 정당의 지지율을 조금씩 빼앗는 것이다. 이 이상은 안된다. 이 이상으로 초록정당의 입지를 줄이면, 배신을 하는 순간 선거에서 이기게 된다. 즉, 균형이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둘은 세 정당이 서로 힘을 겨룰만큼'만' 중도화를 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균형은 성립하게 된다. 초록정당은 어느 한쪽으로 움직일 경우 다른 한 편에게 승리를 내주게 된다.협상력을 위해 움직일 유인이 있던 이전 상황과는 다르다. 자신들의 승리 가능성이 있음에도 다른 쪽에 굳이 승리를 내줄 이유는 없다. 초록정당과 푸른 정당 붉은 정당 모두 균형을 이뤘다. 지지율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닌,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택하였다. 이렇게 제 3당은 존속 가능하다.
이런 구조에서 중도, 진보., 보수에 대한 우리의 선택과 선거의 결과는 그 이념을 실현하게 된다. 거대 양당의 미지근한 중도가 아니다. 이에 더하여, 군소 정당의 목소리도 커졌다. 주황 정당과 노랑정당은 직접 표를 받고, 거대 정당들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중도정당을 포함한 거대 3당체제의 등장과 함께 양극단의 정당들도 힘을 얻게되었다.
특별히 멋지고 긴 결론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정치는 내가 제시한 것처럼 딱딱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사실 그보다도, 언론에서는 나쁘게만 보이는 정치인들에게 소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다만, 이 이야기는 결론으로 괜찮은 것 같다. 극단이 살아야 중도가 살고, 중도가 살아야 극단이 산다. '다양한 의견이 살아있는 사회'는 얼핏 극단적으로 보이는 의견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의견도 살지 못한다. 그저 중론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남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헛소리로 들릴지라도.